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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Mar 27. 2020

안개 그림자 비치지 않고,

霧影不影 (무영불영) 안개 그림자 비치지 않고


濃形略渤霧 (농형략발무) 짙은 윤곽 안개에 사라지니

樺花無聲晥 (화화무성환) 벚꽃만 소리 없이 환하다.

心寂顯虛體*(심적현허체) 마음 고요하여 빈 모습 드러나니,

又日時皮剝*(우일시피박) 오늘도 시간의 껍질을 벗기네.


2020년 3월 27일 아침, 안개 자욱한 날. 학교에 오니 자욱한 안갯속에 조용하게 앉아있는 학교를 본다. 어제저녁 내린 비와 여전히 내리고 있는 안개비가 환하게 핀 벚꽃의 느낌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2020년 봄날의 상황은 여러 사람들의 삶에 엄청난 어려움을 주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지만 학교에 아이들이 나오지 않는 3월 신학기는 여전히 생경하고 혼란스럽다. 


그러나 자연은 이 모든 세상의 어수선함과는 달리 어김없다. 때 되면 꽃 피고, 역시 때가 되면 꽃이 진다. 자연의 질서는 시간과의 조화가 핵심이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간의 문제에 집착하고 있지만 여전히 문제만 있을 뿐, 그 답을 찾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예술적인 관점에서 시간은 표상으로 이해된다. 변화와 활동으로 드러나는 표상인 셈이다. 지금의 표상, 이를테면 안개 비, 벚꽃, 아침, 자욱함 등이 모두 시간의 장면들이다. 하여 나는 오늘 아침 시간의 껍질을 한 겹 벗겨내고 스스로 시간의 화면 속 한 장면이 된다.   

     

* 예운림의 시를 차운하다. 예운림은 중국 원말 ·명초의 산수화가이다. 이름은 瓚(찬)이고 雲林(운림)은 호이다. 원말 4 대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시에도 능통하여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 시간을 벗김: 연속적인 시간의 개념 속에 작은 부분으로 존재하는 자신의 인식으로부터 한 걸은 떨어져, 자신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수평으로 진행되는 시간을 파악하고자 하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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