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절망의 교점에서
#1
漓洳顯漸濃 (리여현점농) 가을비 촉촉하여 보이는 것들 갈수록 짙어지니,
菊冧縣數滴 (국림현일적) 국화 봉우리 물방울 서넛 매달았네.
唯我獨欹悰 (유아독의종) 아! 홀로 즐거워라,
此世難寫得 (차세난사득) 지금 세상은 묘사하기 어려운데.
2016년 10월 25일 오전 비가 내렸다. 국화꽃 봉오리에 물방울 달아 놓더니, 하늘은 맑아져 버렸다. 홀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그 즐거움에 빠지지만 세상은 참담하다. 국가의 꼴이 특정 몇 사람에 의해 너덜너덜 거리는 지경이 되니, 가슴은 답답하고 소화도 잘 되지 않는 분노 속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꽃에 취하고 풍경의 그늘에서 安穩하게 지내는 일뿐이다. 이 지독한 역설 속에 2016년 10월 26일 하루를 보내고 있다.
중범 김준식
#2
아침 출근길에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듣는다. 계절은 겨울도 아니고 나는 실연하지도 않았지만 이 땅에 사는 민중으로 나의 마음은 실연보다도 더 큰 상실감과 자괴감이 어제 오늘의 감정이다.
슈라이어(Peter, Schreier)의 버전으로 듣는 겨울 나그네와 디스카우(Dietrich, Fischer Dieskau) 버전의 겨울 나그네는 확연히 질감의 차이를 느낀다. 슈라이어는 분명 테너 가수다. 물론 그가 오라트리오 전문 가수여서 테너보다는 1~2도 음정이 미세하게 낮으면서 동시에 부드러운 음색을 가졌지만 그래도 외치는 듯한 느낌은 확연히 테너 가수에 가깝다. 반면 디스카우는 분명 바리톤의 음역이다. 그가 가지는 에너지, 격정(절제된 격정)은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가 실연의 노래라는 점에서 본다면 보다 적합한 느낌이 든다. 물론 당연히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본래 바리톤 음역이라는 것이 테너도 아니고 그렇다고 베이스도 아닌 어중간한 음역이지만 음역의 폭은 테너와 베이스 일부를 제외한 매우 큰 편이다. 테너의 터질 듯 한, 그리고 외치는 듯한 음색으로 겨울 나그네를 부른다면 그것은 실연보다는 실연에서 오는 분노나 뒤이어 일어날 것 같은 사랑의 쟁취에 대한 맹세 쪽이 가까울듯하다. 그런가 하면 만약 베이스의 낮은 음색으로 노래하는 겨울 나그네는 더군다나 을씨년스러운 계절의 느낌과 함께 오히려 실연의 깊은 늪으로 빠져 다시는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따라서 실연했지만 이제 그 사랑을 조용히 되돌아보고 스스로에게 다시금 희망을 주기에는 부드럽고 동시에 격정적인 바리톤의 목소리가 이래서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