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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 쿡 Mar 01. 2020

나의 식당 창업 분투기

12막. 8.3평

폐업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할 일이 없었다. 

남은 돈 104만 원으로 며칠 생활하고 나니 주머니의 돈은 바닥이 난 상태였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취직을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난 처음 식당을 창업했을 때 결심했던 것을 지키고 싶었다.  어떻게든 장사로 성공하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처음 시작했을 때 내가 망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다시 시작하는 것에 대해 서는 큰 걱정은 없었다. 돈이 부족해서 장사를 할 수 없다면 트럭에 수족관을 싣고 멍게와 오징어를 팔더라도 장사를 하고 싶었다. 

며칠 그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며 장사할 방법을 모색하던 중 친구에게 돈을 빌려서 포장마차 창업을 시작하려던 차에 어머니께서 생각지 않은 제안을 하셨다. 지금 살고 계신 집을 팔고 같이 식당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망설일 것도 없었고 망설일 시간도 없이 그렇게 하자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서둘러 집을 파셨고 약 두 달간 여기저기 매장을 찾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상가 하나를 찾아냈다. 

고양시의 화정역에 있는 1층의 작은 식당이었다. 작아도 너무 작았다. 내가 하고 싶은 초밥집의 시설을 대충 갖춰진 상태여서 권리금만 주면 더 큰돈이 들어갈 것 같지 않아 그 상가를 더 고민하지 않고 선택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척하며 얻은 매장의 전체 면적이 8.3평이었다.

어머니는 날 믿어 주셨고 결국 그 상가를  선택해 서둘러 계약을 끝내고 매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필요한 장비도 구입했다. 

하지만 매장이 너무 작아 냉장고도 턱없이 부족해 참치 냉동고를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집에 가져다 두었다. 참치는 자주 꺼내 쓰는 것이 아니니 아침에 들고 나오면 된다는... 정말 바보 천치 같은 생각을 했다. 지금 말하기도 쪽팔리다.

식당이 8평이다 보니 남자는 4명이 앉긴 좁고 여자 정도나 네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테이블 한 개, 나머지 좌석은 다찌로 불리는 바 형태의 8인석. 총 12석이었다. 원래 돈까스 집이었는데 잘 안돼서 망했던 자리였다. 인테리어는 일식집 분위기여서 크게 손대지 않고 영업할 수 있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20여 년간 운영해온 초밥집이다.

8.3평... 등기부상 매장은 8.3평.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 평수는 건물 기둥 빼고 8평이었다.

이런 크기의 상가는 테이크 아웃 전문의 커피 매장으로 밖에 사용할 수 없는 매장이다.

서울에서 일식집으로 시작했었지만 여기서는 ‘초밥집’이라는 다소 생소한 키워드로 업장을 시작했다. 

당시 그지역에서는 처음 시도하는 콘셉트이었다. 일본 음식점이 '일식집'으로 통일되던 시기에서 일본식 덮밥과 우동, 횟집과 일식집으로 카테고리가 조금씩 나눠지는 상황이었다. 일식집의 트렌드가 하향곡선을 그리던 시기였고 오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맛집 프로들이 대거 유행하면서 초밥이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보증금과 권리금을 합해 약 7000만 원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 돈이면 얼추 가능할 것처럼 보였지만 오픈하고 돈은 생각보다 끊임없이 들어갔다.

이리저리 알아보다 보니 국가에서 작은 상점들을 위해 지원해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소상공인 국가 지원이 그즈음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바로 소상공인을 위한 자금 대출을 신청했다. 하지만 소상공인 대출 신청은 엄청 까다로워 서류만 30 가지가 넘었고 신청 이후 대출이 나오는데 2개월이 넘게 걸렸다. 줄려는 건지 생색내려는 건지... 그것도 심사하면서 될지 안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어머니는 집을 팔아 전세 보증금이라도 만들어서 아파트로 들어가셨지만 대출의 대출을 거듭하다 보니 나와 아내는 정작 발 뻗고 편히 잘 변변한 방 하나 얻을 돈이 없었다. 대출도 더 이상 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친구에게 보증금 1000만 원을 빌려 15평짜리 초소형 아파트 월세로 들어갔다.


가게를 얻고 며칠 되지도 않아 바로 장사를 시작했다. 

한 번 장사한 경험도 있겠다, 주변에 유동인구도 많겠다, 자신감은 최고였다. 

직원을 따로 구하지 않고 그전에 장사할 때 보조로 일하던 녀석과 함께 일하기로 했다.

이제는 동업도 아니고 내 상가는 아니지만 몇 년은 장사할 수 있게 보장된 내 식당... 너무 기쁘고, 가게가 마냥 이뻐 보였다. 

쓸고 닦고 치우고... 일주일간의 준비가 끝나고 드디어 오픈 전날! 그동안 나하고 같이 고생한 주방 보조에게 내일부터 파이팅의 의미로 고기도 사 먹이고 같이 소주 한잔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오픈날부터 그놈은 나오지 않았다. (후에 식당 오픈을 많이 해보니 오픈 멤버는 대부분 퇴사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저것 할 일이 많은데...

결국 어머니, 아버지, 아내, 나 이렇게 넷이서 영업을 시작했다.'어 차피 모... 가족끼리 하려고 했었으니까 인건비도 줄고 좋네~'하고 생각했다.

오픈이라고 손님이 막 몰려오지는 않았지만 역세권이라 그런지 또 주변에 초밥집이 없어서 그런지 손님은 꽤 있었다. 

개업이라고 주변에 알리지도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나 아버지는 떡을 해서 주변에 돌리자고 했지만 그런 허례허식보다는 맛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떡은 물론 전단지나 기타 다른 홍보도 하지 않았다. 오픈 행사도 하지 않았다.(식당을 창업하고 주변에 떡을 돌리거나 음식을 돌리는 것은 주변 상가에 대한 인사다. 이것은 내 식당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일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장사를 시작하니 한 번 찾아와 주십시오'하는 것이고 동네 후배로서 선배에게 신고한다는 의미이다. 주변의 상가 사람들과 인사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장사의 첫 번째 시작이다.) 

그냥 맛있게 친절하게 하면 손님이 알아주고 금방 손님이 늘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영업의 시작과 동시에 늘어야 할 매출보다 가족의 불화가 더 빨리 늘어났다.  

(작은 식당의 경우 특히 창업 초반에는 지인이나 가족경영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함께하는 구성원 모두 꼭 성공시키겠다는 목표 아래 서로의 욕심은 커지고 욕심이 커진 만큼 목소리도 커진다. 창업 초기야 어쩔 수 없이 가족과 함께 장사를 한다 하지만 수개월이 지나면 되도록, 아니 어쩌면 반드시 가족과 떨어져야 한다. 가족 모두가 그 식당의 리더라는 착각을 하고 있으면 자신들이 하는 말과 생각이 가장 옳다고 느낀다. 결국 배는 갈길을 잃고 산으로 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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