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편이 어려운 집의 경우 자녀가 취직을 하면, 더군다나 장녀가 취직을 하면 당장 대출부터 알아봐 달라고 하는 부모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 경우 백이면 백, 대부분의 딸들은 자신의 명의로 대출을 받아 집안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사회 초년생이 대출을 받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벌써 어떻게든 해결이 됐을 것이며,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간단하고 당연한 생각조차 해보지 않습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저는 처음 취직하고 부모님이 대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심지어 기쁘고 뿌듯하기까지 했습니다. (으악!) ‘내가 취직을 해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됐으니 우리 집의 빚을 얼른 갚아야겠다’ 싶었거든요. “이렇게 빚을 갚을 수 있게 되다니, 나는 능력자야!” 하면서 말이죠. 지금 생각하면 정말 바보 천치 같지만 그때는 진심이었습니다. 다음날 당장 회사 거래 은행에 가서 대출 문의를 했습니다. 은행에서는 제가 계약직이라 최소 3개월은 지나야 대출이 된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전하자 부모님은 낙심했지만 정확히 3개월 후 다시 대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저는 또 그 다음날 은행에 가서 대출 신청을 했고, 1천만 원이 조금 되지 않는 금액을 대출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그 회사에 재직 중이라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대출을 받게 되자 부모님은 크게 기뻐하셨고 앞으로 “엄마 아빠가 이자를 내겠다”며 고마워하셨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당연히 이자는 물론이고 원금 상환까지 해주시리라 철썩같이 믿었습니다. 하지만 말뿐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단 한 번도 이자를 주지 않았습니다. 단 한번도. 심지어 제가 이자 이야기를 꺼내면 미안해하기는커녕 화를 벌컥 냈습니다. 저는 당황했지만 부모님 집에서 함께 살면서 출퇴근하는 입장에서 같이 화를 낼 수는 없었습니다.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어려운 집안 사정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요. 우는 소리를 하는 부모님 앞에서 계속 이자 이야기를 하기 어려웠고 너무 자연스럽게 제가 그 대출의 이자를 갚아나갔습니다.
그 와중에 부모님이 이사를 하게 됐고, 저는 최신 냉장고와 세탁기를 사드렸습니다. 부모님이 사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제 스스로 그렇게 했습니다. 뿌듯하기도 했고 마음이 편하기도 했죠. 이게 바로 K-장녀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집에서 회사를 다니다가 이년쯤 후에 이직을 하게 됐습니다. 퇴사를 하게 되자 은행에서 “퇴사하셨으니 대출을 갚아야 한다”고 부리나케 전화가 오더군요. 저는 부모님께 말하는 대신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과 들고 있던 펀드를 깨서 그 대출을 갚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2년 넘게 직장생활을 했는데도 제 수중에는 돈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20대라는 것을 감안해도 지금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논리에 빠져 있었습니다. 대출을 받고 돈을 갚지 않으니 은행에서 계속 전화가 오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독촉 전화를 받은 저는 진심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제 명의로 돈을 빌린 건 맞는데요, 사실 빌린 사람은 제가 아니고 저희 부모님이에요. 부모님이 대출을 갚으신다고 해서 돈을 빌려 드린 거니까, 저에게 전화하지 마시고 부모님에게 전화하세요. 부모님 전화번호 알려드릴께요” 이때 제 전화를 받은 은행원은 누군지 몰라도 참 어이가 없었을 겁니다.
은행에서 계속 전화가 왔지만 그때마다 저는 계속 똑같이 부모님께 연락하라고 대답했고, 집에 가서 부모님께 “왜 이자를 안 내냐”고 화를 냈습니다. 부모님은 “이번 달만 막으면 우리가 내겠다. 이번 달 수금이 안 돼서 너무 힘드니까 이번 달만 네가 내 달라”고 했습니다. 이런 문답이 계속되기를 몇 달, 저는 포기했습니다. 월말이 다가올 때마다 돈을 막느라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는 부모님의 모습을 뻔히 보면서 돈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냥 내가 이자를 내고 있는 게 편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답답한 이야기의 최종 결론은 이렇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직장을 다니는 내내 이런 식으로 돈을 요구하셨습니다. 이미 대출받은 2천만 원도 상환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마음 약한 저는 다시 대출을 받거나 들고 있던 적금을 깨서 그 돈을 메꿔드리곤 했습니다. 게다가 저는 2천만 원이라는 돈이 그렇게 큰 돈이 아니며, 내가 마음만 먹으면 금방 모을 수 있다는 이상한 착각에 단단히 빠져 있었습니다.
이후 부모님은 저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을 시작한 동생에게도 똑같이 손을 벌렸고 둘은 번갈아가며 대출을 받고, 모아두었던 돈을 갖다드렸습니다. 일찌감치 독립해 대출 요구에서 좀더 자유로웠던 동생에게까지 손을 벌릴 정도로 부모님의 사업은 잘 되지 않았고 그렇게 우리 가족은 다같이 빚의 수렁으로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대출을 갚느라 돈을 모으기 어려웠고, 어쩌다 돈이 모일 만 하면 뭉텅이로 돈이 빠져나가니 돈이 모일 리가 없었습니다. 이자는 꼬박꼬박 나가고 있었고 원금은 상환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죠.
부모님의 가게는 돈을 벌기는커녕 사업을 할수록 빚더미에 올라앉는 마이너스의 구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가게를 접으라고 수차례 말씀드렸지만 부모님은 빚을 정리하기 전에는 그만둘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강조하지만 제 부모님은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경제적인 능력이 없었을 뿐이고, 실제로 돈이 있었다면 갚았을 겁니다. 나쁜 사람이라 돈을 안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 그래서 더 상황이 나빠진다는 점이 오히려 포인트입니다.
만약에 제가 대출을 받지 않고, 모아둔 돈을 드렸다면 차라리 좀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랬다면 정말 돈이 급하게 필요할 때 대출을 받을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저희 집은 끌어다 쓸 수 있는 돈을 거의 다 끌어다 썼고, 결국 부모님은 물론이고 저와 제 동생까지 빈털털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때 주위에서 “돈을 빌려주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는데도 저는 그걸 무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부모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싶었으니까요. 부모님이 우는 소리를 하면 가슴이 너무 아프고, 나라도 나서서 그 문제를 해결해줘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취직을 해서 돈을 벌고 있는 큰딸로서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저는 30대가 됐지만 제 수중에는 단돈 천만 원도 없었습니다. 천만 원은커녕 대출조차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독립을 하고 싶어도 보증금이 없었고 전지금까지 나가지 않던 월세가 아까웠습니다. 그렇게 가족과의 거리두기를 실패하면서 저의 경제적 독립은 멀어져만 갔습니다. 은행 대출, 제2금융권 대출, 일수, 카드론, 보험약관대출, 지인 찬스, 친척 찬스… 가능한 모든 루트를 총동원해 돈을 빌려 겨우 연명해가던 부모님의 사업은 결국 파산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저는 물론이고 제 동생 역시 부모님에게 빌려준 돈을 단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명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예전의 저와 같은 상황이라면, 단호하게 가족의 요구를 쳐내셔야 합니다. 가족의 상황이 어려울수록,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한 사람이라도 돈을 모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잠깐 안쓰러워서 그 돈을 해주기 시작하면 악순환은 끝나지 않습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아마도 그때 “집안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능한 큰딸”이라는 평가에 스스로 취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가족을 돕고 싶다면, 가족과의 거리를 두고, 대출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야말로 당신의 경제적 독립을 이루는 길이자 가족을 위하는 길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기껏해야 사회 초년생인 당신이 대출을 받아 해결될 돈 문제라면, 애초에 당신에게 손을 벌리지도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