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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메이 Oct 24. 2021

떨어져 사는 것만 독립이 아니다

원가족과의 ‘물리적 독립’에 성공했다면, 정서적인 독립 역시 매우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K-장녀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너나할 것 없이 ‘장녀 콤플렉스’를 갖고 있습니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나 혼자서도 집 걱정, 가족 걱정을 합니다. 내가 아니면 우리 집은 어쩌지, 동생들은 어떻게 하나, 부모님이 아프시기라도 하면… K-장녀의 걱정은 끝이 없습니다. 


걱정은 결국 행동이나 말로 이어집니다. 부모님이 조금만 우는 소리를 해도, 동생이 뭔가를 해볼까 한다고 지나가다 말하기만 해도 K-장녀의 머릿속은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오로지 그녀만이 어떤 해결책을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그녀만 모릅니다. 


더 답답한 것은 문제를 야기한 당사자들은 전혀 개선의 의지나 노력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 K-장녀들에게 경제적, 정서적 손해를 끼치는데도 문제 해결의 몫은 K-장녀들 앞으로 넘어오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점입니다. 특히 남자 형제의 금전 문제가 얽힌 경우, 많은 부모들이 결혼하지 않은 ‘K-장녀’의 돈을 자기의 것인냥 갖다 쓰고, 심한 경우 보증까지 받아버리기도 합니다. 



권여선 작가의 <이모>라는 단편소설에 이같은 ‘K-장녀’의 사연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이 소설 속에는 운경호라는 여성이 등장합니다. 윤경호는 맏딸로 태어나 대기업에 입사해 동생들의 생할비와 대학 학비를 대고, 이후에는 남동생의 빚을 갚느라 결혼자금을 헐어 쓰고, 이후에는 그녀 몰래 남동생의 빚보증을 서게 해 놓은 어머니 덕에 신용 불량자가 되어 그 빚을 갚아나갑니다. 한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빚을 갚던 윤경호는 55세가 되던 해 모든 것을 끊고 잠적해버립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췌장암 선고를 받고 투병 석달 만에 죽음을 맞이하죠. 하지만 윤경호의 어머니는 암으로 딸이 먼저 죽고 난 후에 남긴 얼마 안 되는 유산조차 사고뭉치 아들의 빚을 갚는 데 쓰고 싶어합니다. 그나마 소설에서는 그 제안이 단호히 거부되는 것으로 끝나긴 하지만 독자로서 마음이 답답해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가족은 누가 보고 있지 않으면 내다버리고 싶은 존재”라던 기타노 다케시의 말이 저절로 떠오르는 소설이었는데, 현실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부끄럽지만 저 역시 아직 완벽하게 가족과 정서적인 독립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실 독립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결혼할 때 부모님에게서 경제적 지원을 전혀 받지 않았는데 저는 부모님께 서운하다는 생각이 든 게 아니라 “그래도 부모님이 돈을 달라고 안 한 게 어디야”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거든요. 부모님과 관련해서는 마이너스가 당연하다보니 0으로만 수렴해도 다행인,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상황으로 논리가 세워지는 겁니다. 인질이 납치범 편을 드는 일종의 ‘스톡홀름 신드롬’ 현상 비슷한 상황인거죠. 


게다가 ‘K-장녀’에게는 부모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동생 역시 경제적인 측면에 있어서 독립시켜야 할 대상입니다. 그나마 저는 남동생이 없었기에 상대적으로 좀 유연할 수 있었지만, 남동생이 있는 친구들을 보면 부모님의 기대와 대우가 상반되는 경우가 많아서 상황이 좀더 복잡해지더군요. 


여전히 ‘K-장녀’에서 자유롭지 못한 저는 50만원 넘는 월세를 내며 살고 있는 동생을 위해 온갖 청년 주거지원책을 찾아봤습니다. 정보를 자주 보내주다 보니 나중에는 동생이 부담스럽고 귀찮아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죠? 심지어 돈을 빌려달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도 먼저 목돈을 빌려줬습니다. 동생 본인조차 정보를 찾아보고 나서서 바꾸려고 하지 않는데, 제가 먼저 안쓰럽다는 이유로, 돈이 아깝다는 이유로 오지랖을 부리고 있는 것이지요. 부모님에게서는 아주 약간 정서적으로 독립했을지 몰라도, 동생들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K-장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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