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오 Jul 01. 2022

스팸 - 스팸 졸업식

지난 추석에 수확한 스팸을 당근마켓에서 처분했다. 매입가와 비슷한 가격에 내놨으니 내 발품만 손해 보는 셈이었다. 내 공간에서 스팸을 치우고 싶었다. 이미 안 먹은 지 5개월이 넘었다. 내년부터는 다시 먹어도 되겠지만, 다시 안 먹을 자신이 생겼다.


스팸은 내게 경제적 안정감의 상징이었다. 스팸 이전에는 1,000원짜리 프랑크소시지나 비엔나소시지를 먹어 왔다. 이마트나 홈플러스에서는 팔지도 않는 것들이었다. 주택단지 내 할인마트에서 콩나물이나 두부처럼 팔렸다. 10여 년 가까이 가격을 올리지 못했다. 대신 양을 줄여가며 1,000원을 본질처럼 유지했다. 코로나 전후로 더 이상 양을 줄이는 것도 민망해지고 나서야 1,200원으로 인상되었다. 내가 스팸에 입문한 시기와 비슷했다.


당근마켓에서 스팸을 구입할 경우 끼니 당 비용이 소비 가능 수준으로 떨어졌다. 1,200원짜리 소시지 한 봉지로 두 끼를 먹었으니 끼니 당 비용은 600원이었고, 스팸은 200g짜리로 세 끼를 먹었으니 끼니 당 750원 안팎이었다. 150원은 맛의 격차를 아득히 초월했다. 고기 함유량을 따지면 스팸 가성비가 더 좋았다. 간혹 200g으로 네 끼를 먹기도 했으니, 명절마다 당근마켓에서 스팸을 수확하는 것은 자취생이 스스로 쟁취하는 분배 정의였다.


스팸이 더 맛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당근마켓 이전에 명절 선물로 받은 스팸을 먹은 적 있었다. 다만 이벤트와 일상을 구분하는 균형 감각을 유지할 뿐이었다. 놀이 공원은 재밌지만 매일 갈 수 없는 법이었다. 스팸은 내 세계 음식이 아니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 봤다는 체험만으로 충분했다. 아니, 혀는 솔직하고 고집에 셌다.


돌이켜 보면 귀찮아서 안 먹을 뿐이라고 변명해 왔던 것 같다. 스팸의 식사 형태는 1,200원짜리들보다 한 단계 더 번거로워졌다. 프랑크소지는 3개, 비엔나소시지는 6개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었다. 스팸은 전자레인지를 돌리기 전에 티스푼으로 퍼야 하는 수고와 먹은 후 설거지 거리로 티스푼이 더해져서 귀찮았다. 자취생의 귀차니즘을 얕보면 안 된다고 능청떨면, 나는 당당해졌다. 욕망하는 순간, 가난이 구체적으로 서술된다.



식구 중 누군가가 아프거나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없지 않는 한, 가난은 그리 비참하지 않다. 절대적 빈곤이 개선된 한국 사회에서 어지간하면 먹고는 산다. 이제 가난은 대체로 상대적 형태로 존재한다. 나이키를 선망하며 시장표 신발이 부끄러웠던 내 어린 시절처럼 스팸을 욕망한 순간 나는 가난을 의식하게 되었지만, 스팸을 일상적으로 구매함으로써 가난에서 해방되었다. 가난의 무서운 점은 150원,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시시함에도 얽매이는 단단한 합리성에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고작 스팸이겠지만, 내게는 무려 스팸이었다. 스팸을 먹는 것은 tv나 유튜브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광고를 내 생활 속에 들임으로써 나도 세계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섭취하는 일이었다. 광고는 소비자에게 매달리는 기업의 안간힘이고, 소비는 거대 기업을 상대로 갑이 될 수 있는 얄팍한 권리다. 나는 광고에 호응해줌으로써 내 권력 의지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1,200원짜리 프랑크소시지와 비엔나소시지는 광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저렴함에 내가 복종할 뿐이었다. 그런데 햄의 이데아라고 생각한 스팸이라니, 나는 공식 인간이 된 듯했다.


이런 스팸을 이제 졸업하고자 한다. 다음 단계의 어느 고급 햄으로 승급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가성비가 숨겨 놓은 함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가공된 식료품의 맛은 화학첨가물의 업적이었고, 이 업적은 건강을 담보로 한다. 당장은 맛있겠지만, 몸은 충격을 적립해 놓는다. 물론, 몸은 자정 작용도 한다. 인간의 몸은 고도의 면역체계를 가진 화학시스템이다. 그러나 몸의 정화 속도는 식습관이 쏟아붓는 화학첨가물 양을 따라가지 못한다. 늙어야 늙음을 알 듯, 아파야 몸을 안다.


두텁게 쌓인 내장지방에서 대사증후군이 혈관으로 뿌리내렸다. 스팸이 만드는 끼니의 생태가 몸을 비만으로 이끌었다. 스팸 한 끼 섭취분량은 230칼로리 안팎으로 그리 높지 않았다. 밥 330칼로리에 밑반찬 약간이면 600칼로리 남짓 되는 적정 칼로리로 한 끼를 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화학첨가물이 만든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지는 것이 문제였다. 집밥의 스팸은 돈을 조금 더 써도 괜찮은 여유를 근거로 햄버거, 피자, 치킨으로 쉽게 이어졌다.


화학첨가물의 입맛 지배기를 30대는 버텼지만, 40대는 아니었다. 몸이 병원비로 상환을 요구해 왔다. 청구 금액은 가성비로 아낀 금액을 초과해서 손실로 최종 합산되었다. 작년부터 시작된 병원 투어의 원흉은 결국 비만이었다. 고혈압, 지방간, 콜레스테롤 증가는 직접적 원인이고, 면역력 부족에서 비롯된 다양한 염증성 질병들도 비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화학첨가물과 면역력의 과학적 인과성은 모르지만 직관적으로 상관성을 확신했다. 술․담배를 하지 않는데도 위장, 소장, 대장에서 작은 용종 몇 개를 떼어냈다. 발바닥과 무릎도 체중을 버티지 못하고 소소하게 고장났다. 스팸, 아니 스팸으로 대표되는 화학첨가물로 점철된 식료품들은 느리지만 착실하게 내 몸을 망가트려 온 것이다.


스팸 졸업을 구상한 것은 안면신경마비가 오면서였다. 올해 초 갑자기 입이 돌아갔다. 바이러스성이었고, 면역력이 떨어진 탓이었다. 살로 서서히 부풀어 오른 얼굴에는 적응해 갔지만, 갑자기 일그러진 얼굴은 충격이었다. 내 몸이 어처구니없이 망가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 최근 2년 121마리를 먹었던 치킨부터 끊었다. 모든 식욕은 거울 앞에서 무마되었다.


그때의 구상은 이제 확신으로 변했다. 나는 끼니에 스팸을 욕망하지 않을 자신 있다. 스팸은 시금치, 양배추, 상추, 시레기 등으로 대체되었고, 화학첨가물은 간장이나 쌈장으로 대체되었다. 단백질은 계란, 삼겹살, 등 푸른 생선, 마른 오징어, 두부로, 지방은 참기름이나 아몬드로 섭취했다.

스팸 졸업은 끼니의 생태를 바꾸는 일이다. 끼니의 생략 없이도 스팸을 졸업하는 것만으로 운동은 거의 못한 채(족저근막염, 무릎 통증) 6개월 사이에 12kg가량 감량했다. 지방간 약, 콜레스테롤 약에서도 졸업했고, 혈압약은 한 단계 낮췄다. 무엇보다도 마스크 벗는 일이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내 얼굴을 타인에게 보일 수 있는 당당함은 스팸보다 맛있다. 혈압약도 끊어낼 수 있을까, 요즘 어려운 꿈을 꿔 본다.

이전 07화 느타리버섯 - 내 몸을 지키는 최적 효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