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마실 것’ 구매력을 아메리카노가 마셔버렸다. 아메리카노는 21세기 숭늉으로 식후를 지배했다. 편의점에서도 원두를 내렸으므로 시도 때도 없는 테이크아웃도 가능했다. 커피전문점이 치킨집처럼 레드오션이 된 시대, 아메리카노가 아니더라도 심심한 입과 놀아줄 음료는 다양했다. 캔음료 시장이 위축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현실은 아니었다. 정확한 통계는 찾을 수 없었지만, 알루미늄 캔 원료 수입이 2020년대 후반까지 증가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을 보면 캔음료 시장은 전망이 괜찮아 보였다. 저점을 찍고 상승하는 것인지, 소비 규모가 커진 것인지는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마실 것이 당길 때, 욕구를 무시하는 편이었다. 음료는 씹는 맛도 없고, 허기를 채우지도 못하는 주제에 칼로리만 높았다. 마시지 않다보니 특별히 무언가 마시고 싶어지는 경우가 드물어졌다. 더군다나 2022년에는 체중 감량 때문에 더 멀어졌다. 아메리카노는 자발적으로 마시지만 샌드위치를 먹기 위한 보조 수단이거나 카페인이 필요한 경우였다. 1년에 몇 번은 갈증 때문에 뭔가를 마셔야 할 때도 있다. 몸은 콜라를 원했지만 우리나라에서만 가격이 무례했고, 생수를 돈 주고 사 마시자니 억울했고, 비용은 갈증에 지불되어야 하므로 보통은 행사 중인 이온 음료를 마셨다.
내 건조한 음료의 세계에서 독보적 존재는 ‘데자와’였다. 콜라조차도 코카와 펩시를 구분하지 않는 마당에 데자와는 마실 것 중 하나가 아니라 독자적인 이름으로 존재했다. 체중 감량 전에는 매주 한 캔씩은 마셨다. 맛, 카페인, 가격의 교집합에 접근성이 더해졌다. 나는 주로 지하철로 움직였고, 지하철 역 자판기 우측 하단은 데자와 자리였다. 출근길 한 캔은 카페인까지 더해져 아침의 우유 한 잔보다 든든했다.
언제부터 데자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왜 데자와였는지는 안다. 지하철 자판기에는 마실 만한 게 없었다. 포카리스웨트는 운동 후에나 먹는 수분보충제였고, 다른 음료는 왠지 어설퍼 보였고, 카페인은 필요했지만 커피는 일상의 다른 영역에서 마실 일이 흔해서 배제하고 나면, 데자와만 남았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솔의 눈’과 더불어 음료계의 ‘클레멘타인’류의 이단 취급 받았기에 선입견이 있었지만 1997년생으로 만만찮은 생명력을 가진 것을 보면 나름 존재 이유가 있겠거니 했다.
로얄 밀크티. ‘로얄’이야 상업적 수사이므로 무시했다. 캔커피가 500원일 당시 800원이기 위해서 음료 계보의 왕족이라도 되어야 했을 것이다. ‘밀크티’는 마셔본 적도 없었다. 홍차에 우유 섞은 맛이라고 하지만, 한두 번쯤 마셔봤던 홍차 맛이 기억나지 않았으므로 밀크티는 우유 근처의 미지였다. 단, 내 직관 속에서 홍차의 ‘홍’은 홍삼에 직결되었고, 데자와 캔도 인삼 색깔 같아서 데자와는 ‘인삼 우유맛 커피’로 상상되고 말았다.
실제 데자와는 상상만큼의 인삼 우유맛 커피였다. 고려인삼껌을 가루 낼 수 있다면, 그 가루를 카페라떼에 태워 희석한 맛이었다. 맛 자체는 달지 말지 결정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지만, 향을 인삼으로 인식해버리고 나니 데자와는 가성비 괜찮은 ‘인삼라떼’였다. 라떼는 본래 단 맛이 없으니, 미적지근한 단 맛은 라떼 치고는 달달하게 느껴져 오히려 입에 맞았다. 나의 데자와 선호는 순전히 선입견이 만든 실수였던 것이다.
한 번 정을 붙이고 나니, 특별한 광고나 판촉 행사 없이 음료계의 구석을 지키는 모습이 대견했다. 데이터 스모그가 미세먼지 수준으로 촘촘해진 시대에 데자와는 그러거나 말거나 침묵으로 일관했다. 정말 광고를 안 하나 찾아보니, 출시 초기에 5년쯤은 광고를 한 듯했다. 지금도 내 생활권이 아닌 어딘가에서 광고 중일지 모르나 나는 데자와 광고를 본 적 없다.
‘2% 부족할 때’, ‘초록매실’,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도 출시 초기에 광고가 집중된 것을 보면 이 업계의 특성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우성, 조성모, 이준기의 광고는 문화 콘텐츠가 될 만큼의 파격적인 인기로 제품의 전성기를 열었었다. 그 빅뱅의 관성만으로도 지금의 존재 이유가 납득됐다. 각각의 제품명은 사람들의 장기기억에 박카스에 준하는 고유명사로 새겨졌다.
내가 아는 한 데자와는 전성기 한 번 없었다. 굳이 홍차와 연관짓자면 ‘실론티’ 광고가 아슬아슬하게 기억에 걸려 있을 뿐, 데자와 존재감은 0%였다. 무엇보다도 데자와의 옛날 광고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달랐다. 광고가 강조하는 것은 ‘유럽풍’이었다. 코로나 이후 유럽에 대한 환상이 박살난 요즘도 ‘유러피언’이 ‘뉴요커’처럼 세련된 고급 이미지를 띠니, 20여 년 전에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유럽은 우리가 넘볼 수 없는 선진국이었고, 고급은 내가 넘볼 수 없는 허영이었으니, 내가 그 광고를 봤다고 한들 소 닭 보듯 했을 것이었다. 출시 20여 년이 넘어 내게 유럽풍 인삼라떼였으니, 실소했다.
이런 글을 쓴다고 해서 내가 데자와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음식처럼 음료 쪽에도 특별한 취향은 없다. 토마토 주스와 데자와가 있다면 건강 때문에 토마토 주스를 마실 것이다. 단, 커피나 과일 주스는 다른 경로를 통해서 어떻게든 접하지만, 데자와는 내가 자발적이지 않는 한 접할 기회가 없으므로 내가 뭔가를 마시고 싶을 때 데자와에게 우선권을 줄 뿐이다. 그리고 권해 본다. 내 비록 무던한 입맛이지만 ZICO를 걸레 빤 물로 인지하고 다시는 안 마시기로 맹세한 단호함도 있다. 그 수준에서 데자와는 한 번쯤 마셔볼 만한 인삼라떼다.
데자와는 별 볼 일 없는 블루오션의 왕자다. 같은 회사의 포카리스웨트도 경쟁자를 따돌리기 위해 광고에 최선을 다하고, 음료 업계의 정점에 선 코카콜라조차도 펩시콜라와 경쟁해야 하는데, 데자와의 영역에는 경쟁자가 없다. 인감라떼 업계 파이는 누군가와 나눠 먹을 만큼 크지 않는 모양이다. 음료의 변방에서 데자와는 미미하지만 독창적 존재감, 알고 보면 나름 탄탄한 내실, 그래서 남들이 뭐라든 괘념치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며 고고하다.
나도 데자와처럼 살고 싶다. ‘좋아요’의 숫자가 절대 가치가 되는 시대, 사람들의 선호 바깥에도 길이 있다. 선호 쟁탈전의 요건인 ‘최선’에는 충분히 지쳤다. 그냥 데자와 정도의 얌전한 존재감과 생명력이면, 충분히 ‘라라라라라라라~ 날 좋아 한다고.’ 콧노래를 부르며 샤방샤방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인생에 가장 가까운 예외, 밤하늘이 아름다운 이유 같은 데자와, 곰방와(こんばんは), 별이 뜬 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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