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출산율 게임은 끝났다. 이미 0~9세 인구는 할머니 세대의 절반 수준이다. 먹고 살기 힘들어 안 낳기도 하지만 평범함을 바라보는 눈높이가 높아져 돌이킬 수 없다. 3등급이면 상위 23%인데도 갈 만한 대학이 없고, 4등급이면 상위 40%인데도 성적이 왜 그 모양인지 물을 정도로 평범함이 살벌해졌다. 한국에서 평범함은 낙오를 의미했고,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2020년 근로자 평균 소득은 320만 원이고, 중위 소득 242만 원이다. 결혼 시장에서 평균값은 간신히 체면치레 한 셈이고, 중위값은 민망하다.
월세 포함 70만 원으로 혼자 살아지니 242만 원이면 세 식구 못 살 건 뭐 있나 싶다. 맞벌이에 지자체의 출산/육아 지원금을 합하면 242만 원보다 사정은 나을 것이다. 싼 게 비지떡인 것을 기술로 극복한 시대지만, 기술은 SNS로 플렉스를 구축해 알뜰함과 소박함을 궁상맞음으로 전락시킴으로써 극복 불가능한 빈곤을 창조했다. 구질구질한 사랑보다 샤방샤방 흉내라도 낼 수 있는 혼자를 선택하는 것이 가성비의 삶이란다. 가성비에 민감하면서도, 사랑을 구축하는 데 가성비 기준을 지나치게 높이 잡은 세대는 저출산 문제를 풀 수 없다. 대한민국의 희망은 90년대생이 아니라 중위소득으로도 가정을 꾸리고 출산에 적극적일 이주민에게 있다.
답을 알면서도 창밖을 지나다니는 정답들이 썩 편하지 않았다. 나는 국제적이어서 미래지향적 동네에 살고 있다. 창을 열어두면, 한국어보다 중국어를 비롯한 국적을 알 수 없는 언어들이 더 많이 들렸다. 1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인 대학생과 직장인이 거주했다. 조금씩 중국인 유학생이 느는가 싶더니 이제는 인근 공단 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화 되었다. 할인 마트마다 외국인 식자재 코너가 따로 있고, 외국어로 된 식당들이 늘어났고, 이슬람 아지트 같은 것까지 생겼다. 히잡을 쓴 아주머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풍경이 흔했다.
위화감에는 익숙해져 갔다. 한국인이라고 해서 말을 섞고 지내지 않으므로 저 NPC(non player character)들의 국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내가 집을 나서려고 하다가 다른 집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잠시 기다려서 상대와 마주치지 않는 불문율이 배려인 동네다. 오히려 세계화의 첨단에 서 있다고 상황을 왜곡하면 우쭐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위기감은 점점 커져 갔다. 한국어가 결핍된 세계, 내가 내 나라에서 소수 민족이 되어 가는 기분은 썩 달갑지 않았다. 한국어 하나 없는 식당 간판을 볼 때면 무례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언어 역전의 세계에서 내 다문화 시각을 재확인했다. 평소 용광로 정책을 지지하면서도 샐러드볼 정책도 상관없다는 주의였다. 그러나 나의 ‘상관없다’는 그들이 소수로 존재하는 경우에 한함을 알았다. 우월적 다수에서 그들의 문화를 ‘허용’하는 다문화였지, 등권적 다문화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내 다문화관은 보편적 수준에 속할 것이다. 예능인 샘 해밍턴이나 콩고 왕자 조나단을 한국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심리적 저항이 덜한 이유는 그들이 한국 문화를 수용했기 때문일 뿐이다. 우리는 그들 민족 문화에 관심 없다. 그리고 우리 동네 외국인들은 한국어에 관심 없다.
우리는 공존하되 공생하지 못했다. 상호작용 없는 공존은 골목마다 규격 쓰레기봉투가 아닌 마구잡이로 버려진 쓰레기 더미처럼 위태로웠다. 그들에게 이곳은 잠시 머물다 돌아갈 인생의 간이역이다. 당근마켓 동네생활 게시판에서 우리 동네는 우범지대가 되어 있었다. 여자 혼자 살기 위험한 동네라고들 했다. 하긴 나도 중앙아시아계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 있는 옆을 지날 때는 경계심이 들곤 했다. 평화의 표면 아래에 이질성을 향한 본능적 경계심이 이유 없는 적대감으로 스멀스멀 변질되어 갔다. 여성 혐오, 세대 혐오 다음은 인종 혐오일 듯했다. 물론, 나는 아니다. 베트남 쌀국수를 먹었기 때문이다.
그냥 좀 새로운 음식이 먹고 싶었다. 다이어트 하느라 외식은 샌드위치와 잔치국수로 제한해 왔다. 간간히 물회를 섞었을 뿐, 목표 체중에 도달하기 전에 짜장면, 국밥, 돈가스 등 기름진 칼로리를 허용할 생각은 없었다. 식탐을 통제하는 일은 의지를 필요치 않는 습관이 되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은 식탐이 꽤 떼를 써댔다. 기존 선택지는 모두 기각할 수 있었지만 맛있는 것이 먹고 싶은 충동은 다스려지지 않았다.
왜 하필 베트남 쌀국수인지는 모르겠다. 고기 국물에 만 탄수화물이니 국밥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기에 선택지에 들어갈 만한 메뉴도 아니었고, 지나가는 길에 있는 가게도 아니었다. 단지 먹은 지 오래 되었다는 이유로 선택한 듯했다. 일이 연속되고 있었기서 일탈을 먹고 싶었던 것이다. 국밥이 아니라 잔치국수의 하위 부류라 합리화하며 길을 잡았다. 약간의 죄책감을 모른 척했다가 나중에 베트남쌀국수는 500칼로리 정도의 다이어트식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서야 안도했다.
그곳은 우리 동네 최초로 베트남어 간판을 내 건 가게였다. 지금은 이국적 언어로 된 간판이 흔해졌지만, 당시만 해도 황당했다. PC방 있던 자리가 몇 달 공실로 놀더니 코로나가 한창인 어느 날, 검은색 바탕에 노란 글씨로 된 간판이 도로 표지판처럼 걸렸다. 멀리서도 간판이 눈에 띌 수 있는 데 집중했을 뿐, 최소한의 미적 기능도 없었다. 유리벽을 진하게 선팅해서 안이 보이지도 않아 불법 도박장 같았다. 큼지막하게 적힌 베트남어 아래 작게 쓰인 ‘베트남 쌀국수’가 없었다면 뭐 하는 곳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알았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가게 앞에 북적대는 베트남인들은 접근 금지 표식 같았다.
베트남 쌀국수와는 별다른 인연은 없었다. 내 입에 맞았지만 가성비도 나쁘고 정체성도 애매했다. 면이 먹고 싶으면 짬뽕을 먹으면 되었고, 고깃국물이 먹고 싶으면 국밥을 먹으면 되었다. 저가형 프렌차이즈 쌀국수 집이 잠깐 유행할 때 잔치국수 아류 느낌으로 가끔 먹다가 그 이후로 먹은 기억이 없었다. 내가 고수를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5년도 넘은 일이었다.
그들만의 공간에, 뭐 어쩌라고의 기분으로 발을 디밀었다. 내가 한국어로 주문하자 사장도, 직원도, 손님도 ‘네가 왜 거기서 나와?’의 눈빛으로 힐끔거렸다. 잠깐이지만 홀과 주방, 손님과 손님 간 오가던 베트남어가 멈췄다. 침묵의 불협화음은 잠깐, 나는 공손하게 환대 받았다. 이 공간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의식한다는 생각에 연예인이이라도 된 듯했다. 빈자리에 앉고 보니 그냥, 식당이었다.
가게 내부는 생경했다. 화려하고 치렁치렁한 것들은 이국적이되 베트남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베트남 이미지는 삿갓과 아오자이가 전부였다. 계산대 앞은 택배로 어수선했다. 카드를 건넬 때 손을 뻗어야 할 만큼 쌓여 있었다. 포장 상태가 투박한 것을 보면 베트남에서 왔거나 보낼 택배인 듯했다. 마침 택배 기사가 와서는 남자 사장님과 얘기하더니 5시에 다시 오기로 했고, 여자 사장님은 내 앞 테이블에 앉아서 택배 주소 종이에 뭔가를 썼다. 여자 사장님이 전화로 베트남어를 하는 것을 듣고서야 베트남인인 것을 알았다. 계산대 포스기 옆에 너덧 살짜리 여자 아이 사진 액자가 놓여 있었다.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공적 공간 중에서도 식당과 베트남인들의 아지트 역할이 혼재된 난삽함이 동네 분식집의 인간미처럼 푼푼했다.
배경 음악으로는 발라드 계열의 노래가 나왔다. 중국어 같기도 하고 영어 같기도 한 발음을 알아들을 수 없어 음성으로 연주되는 클래식 같았다. ‘베트남 가요도 생각보다 세련되었다’고 느끼는 것에서 내 문화 우월주의를 되짚었다. 분식집에 깔린 <사계>처럼 어울리지 않았지만, 한국 아이돌 음악이 쿵쾅댈 바에는 잔잔한 볼륨이 편안했다.
직원은 체구가 작은 20대 초반의 베트남 여성이었다. 화장실이 어디냐는 물음은 알아듣지만 대답에서 말보다 몸짓이 앞서는 걸 보면 학생은 아닌 듯했다. 몇 마디 안 되는 말도 왼쪽, 오른쪽 같은 명사로만 채워졌다. 서빙된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도 레몬을 집어 쌀국수에 짜는 흉내를 냈다. 나는 따로 나온 고수와 숙주로 추정되는 풀떼기를 순차적으로 넣는 것인지 한 번에 넣는 것인지를 묻고 싶었지만 포기했다. 국밥충의 식습관대로 그냥 다 넣었다.
넣기 전, 국물부터 맛 봤다. 밥 먹기 전에 국부터 뜨면 나이 들었다고 하던데, 뭐, 그래, 그렇다. 설렁탕, 곰탕에 익숙한 한국인에게 낯익었다. 대여섯 숟갈 맛보고 나서야 풀떼기를 다 넣었다. 고수가 아무리 향의 고수(高手)로서 이국의 비누맛을 고수(固守)한다고 해도 이 진한 육수를 얼마나 헤칠까 싶었다. 천천히 간 조절을 해도 될 텐데, 레몬 두 조각도 다 짜 넣었다. 먹으라고 준 음식, 맛은 어떻게든 조합될 터였다.
다시 고수와 함께 국물을 맛 봤다. 첫술에 이 글의 첫 문장을 생각했다. “내 창을 넘어오는 외국어에서 베트남쌀국수 맛이 난다.” 고기 국물 끝에 박하 계열의 화한 맛과 레몬즙이 섞여 새콤함이 섞여 고기 국물이 산뜻해졌다. 국물까지 다 마심으로써 베트남쌀국수는 잔치국수가 아니라 베트남형 국밥이 되었다. 나는 잔치국수, 라면, 짬뽕 같은 면 음식은 국물을 다 마시지 않았지만 국‘밥’은 밥이므로 국물까지 다 비웠다. 이날부터, 베트남쌀국수는 한식의 아종이었고, 저칼로리 국밥을 내가 안 먹을 이유는 없었다.
올 봄 콩나물국밥, 여름 물회에 이어 내년 겨울은 뼈다귀해장국이 예약되어 있고, 그 사이는 베트남쌀국수로 채워질 듯하다. 세 번째 방문에는 공사 중이었다. 그래서 최근에 생긴, 집에서 가까운 곳에 갔다. 테이블 두 개짜리 소박한 식당은 내 정서에도 꼭 맞았다. 첫 날은 베트남 쌀국수를 먹었고, 다음 날은 메뉴판에서 02로 넘버링 된 분보 후에를 먹었다. 이 역시도 고기 국물을 기반한 한식의 아종이어서, 다음은 03 꽃게 국수를 먹으려고 한다. 그렇게 번호 깨기를 하다 보면, 이슬람 아지트 같은 건물 아래에 있는 식당에도 방문하게 될 것 같다.
내 새로운 식습관은 다문화적 관용에 영양제를 먹이는 일이다. 그들과 함께 해야 할 미래, 창밖의 외국어와 공생하는 일은 입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입 안에서 대한민국이 맛있게 넓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