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오 Oct 10. 2023

박카스 - 내게 가까운 영혼 소환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가장 하고 싶은 것, 자고 싶다. 어중간한 요의는 무시했다. 일어났다가는 간신히 붙들고 있는 수면의 꼬리마저 놓쳐버릴 것 같았다. 비몽사몽간에 목덜미와 등세모근이 딱딱한 게 느껴지고 손발이 저릿한 듯 징징 울렸다. 뻐근함과 찌뿌둥함을 껴입은 수마로 설명되는 각성이 감당되지 않았다. 주말에 잠만 자던 아버지들의 몸이었을 것이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놀아 달라고 재잘대는 자식새끼가 없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방은 고요했다. 24시간 열어둔 창 밖에서는 새들이 떼거지로 지지배배 지지직댔다. 소리들이 서로 부딪치고 터지며 육즙이 튀기는 듯했다. 머릿속이 눅진눅진했다. 나는 새소리의 통조림 속에서 40년 묵은 고깃덩이 같았다. 기름에 살이 물크러져 기름과 살의 경계가 진득진득 흐무러졌다. 아니, 나는 피로의 고형이었으니 진짜 녹아내렸다가 재구성되고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건 도저히 못해먹겠다. 아침을 열어 준 새떼들의 파이팅을 받고도 무력해서 죄스러웠다.


다시 잠들기를 포기하고 누운 채로 텀블러에 담아 둔 자리끼를 들이켰다. 그란데 사이즈컵에 반나마 있었으니 250ml 이상은 되었다. 목에 복숭아씨처럼 걸려 있는 열감 덩어리가 삼켜지지 않았다. 입도 뻥긋하기 싫었다. 주말 이틀 동안 매일 10시간쯤 떠들어댔다. 수업 한 타임 더 끼우지 않길 잘했다. 오전 7시 40분에 집을 나서서 오후 10시 30분 조금 넘어 귀가하는 스케줄은 고등학생들이라면 누구나 소화하고 있지만 나는 더 이상 10대가 아니었다. 기지개를 켜 봤자 소용없었다.


마음먹으면 일어날 수 있었지만, 그래 봤자 책상 앞에서 졸기만 할 게 뻔했다. 옆으로 누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SNS, 블로그, 브런치에는 밤 새 별 일 없었다. 1분만, 1분만, 1분만, 시간을 죽여 나갔다. 바빠 죽겠는데, 쓸데없이 시간을 죽여서 또 죄스러웠다. 그래 봤자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요의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요의에 떠밀려 자리에서 일어날 때, 물에서 건져낸 빨래처럼 몸이 축 쳐졌다. 힘껏 쥐어 본 주먹이 가벼웠다. 이거, 이거, 여중생이랑 맞짱 뜨면 이길 수 있을까, 실소했다. 두통이 없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간혹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서 오전을 통으로 지워야 할 때도 있었다. 세탁기에 들어가 몸을 탈탈 빨아내고 싶었다. 탈수하듯 소변을 보고 나면 이제야 부팅 버튼이라도 눌러진 것 같다.


밥을 안치고 커피 물을 올렸다. 코르티솔이 분비되는 기상 후 1-2시간 이내에는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하지만, 정신이 차려지지 않으니 별 수 없었다. 애초에 내 기상 시간을 특정할 수도 없었다. 코르티솔이 새벽부터 난동을 부려 나를 각성시켰는지도 몰랐다. 내 몸의 과학은 알 수 없고, 피로는 지나치게 알 수 있어서 내게 카페인을 주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의무감으로 아침을 먹고 나면 시험 기간 여중생 정도는 무찔러 볼 만한 기운이 차려졌다. 그 기운으로는 여중생 두 배의 덩치를 가동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노트북을 들고 인근 대학 도서관으로 갔다. 외부인에게 출입이 개방된 것을 반수생이 알려준 덕분이었다. 방학 중 대학 도서관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라도 내겐 출근길이었다. 월요일은 말이 휴일이지 재택근무 하는 날이었다. 오아시스를 찾아 사막을 헤매는 방랑자의 기분으로 걸었다. 아니, 걸어졌다. 내가 가는 곳이 오아시스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마땅히 존재하고 싶은 곳이 없었다. ‘마라탕’ 소리만 들어도 방긋 웃는 여중생도 월요일 등굣길이 썩 발랄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전 주에도 그런 상태로 도서관에 갔다가 졸다가 왔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는 내 정신력은 믿을 게 못 되었다. 보통의 인간은 정신력이 체력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력이 정신력을 지배했고, 나는 보통을 넘어 통통한 인간이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마약 같은 응급조치, 박카스였다. 선물 받은 산삼 배양근, 비타민, 홍삼은 건강식품이지 회복 약물이 아니었다. 박카스는 내 무의식에 새겨진 나의 힐러(healer)였다.


유년 시절 어른을 선망하듯 박카스를 선망했다. 박카스는 먹으면 안 되는 ‘어른 약’이었다. 지금도 공식적으로 15세 미만은 복용하지 말라고 한다. 그럴 만도 하다. 어린이는 쌓일 피로가 없었다. 그날 하루를 어떻게 보냈든, 눈 뜨고 일어나면 배터리가 완충되었다. 중학생이 되어 시험 기간에 잠을 충분히 먹을 수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커피나 박카스를 마시곤 했을 뿐, 10대는 기본적으로 잠이 보약이었다.


엄마는 내가 머리가 아플 때만 박카스를 허락하셨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 당신도 모르시니, 영영 알 수 없었다. 두통은 박카스의 기회였지만 꾀병을 피운 적은 없었다. 어차피 걸렸다. 그래서 두통을 소소하게 반겼다. 박카스는 반드시 뚜껑에 따라서 한 모금씩 홀짝였다. 술잔을 기울이는 어른 흉내기도 했고, 마실수록 줄어드는 박카스가 아깝기도 했다. 어른이 되면 반드시 한 대접씩 마시겠다고 다짐했지만, 잊혔다. 기억을 더듬고 보니, 그땐 그랬지, 발견했을 뿐이다.


박카스는 위기는 있었으나 버텼다. 알프스D가 추격하는 듯했고, 비타500이 등장했을 때는 꽤 타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도 비타500과 박카스를 구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제품에 건강한 이미지가 더해져 비타500을 선호한 적도 있었다. 박카스가 의약외품에서 자양강장변질제로 바뀐 것과 비타500이 그냥 음료이므로 애초에 비교 대상이 아닌 것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사실관계와 무관하게, 내가 박카스에 다시 닻을 내린 것은 2008년, 2009년 ‘박카스 스타리그’ 덕분이었다. 고시원에 갇힌 내일이 막막할 때, 내 협소한 취향을 후원해준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횡단보도 앞 약국에서 박카스 한 병을 사 마셨다. 600원, 아직도 그 가격임에 놀랐다. 600원은 꽤 오래 전 기억이었다. 2015년 뉴스에 따르면 51년 간 소비자물가 상승률 1903%에 비해 박카스는 1400%에 지나지 않았다. 팬데믹 이후 모든 물가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는데도 박카스는 8년 전 그 가격이니 2016년 캐치 프레이즈 ‘나를 아끼자’는 진심이었다. 시장의 속사정이 어떻든 간에 8년 전과 동일한 가격의 상품은 싸구려가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나를 지지해주는 고마움이었다.


약국 앞에서 도서관까지 도보 7-8분, 과연 박카스였다. 플라시보 효과든, 박카스에 매달린 내 지난날이 보내오는 원기옥(元氣玉)이든, 그날의 피로는 그날에 풀리기 시작했다. 주먹을 꽉 쥐어봤다. 이것은 영혼 소환술, 과연 주신(酒神), 박카스에 취한 영혼이 나라면 나는 박카스 인간이다. 탕후루로 기운 충전된 여중생도 이길 자신이 생겼다. 도서관에서 무려, 졸지 않았다. 그리고 썼다.


월요일은 박카스 마시는 날이 되었다. F가 더 커서 마트에서 F를 마셨다가 피로를 풀어주는 타우린은 D에 2배 더 들어 있다는 걸 알고 약국에서 D를 마셨다. 내 월요병 치료제, 덕분에 또, 일한다, 꽤 멀쩡히, 뭔가 멍청히.

이전 10화 민들레 - 너마저 김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