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오 Oct 17. 2023

천 원짜리 아침밥

모바일 결제가 카드 결제보다 보편화 된 시대, 지폐는 노점에서나 쓰는 비상금으로 전락했다. 지폐는 들고 다니기 번거로운 화폐 체계의 망령이다. 그러나 지폐가 주는 물성의 손맛은 여전히 든든하다. 지폐는 가능성과 자신감의 실물이다. 지갑의 두께만큼 뱃심이 차오른다. 지폐를 셀 때, 하나, 둘, 셋, 손끝에 미각세포라도 생기는 것 같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경계가 흐릿해지며 세상이 달달해진다.


천 원짜리는 애매하다. ‘엄마, 100원만.’을 기억하기에, 과자 한 봉지 사지 못하는 지폐는 잔돈 같다. 그러나 천 원짜리 대신 500원짜리 두 개를 갖고 있을 때, 뭔가가 쪼개져 불완전한 느낌이 드는 것을 보면, 십진수의 관습 덕분에 천 원짜리도 지폐의 체면을 건사한다. 아직은 잔돈이 아니다. 화폐 존엄성 단위의 최소한, 천 원이다.


요즘 일주일에 서너 번 천 원짜리 아침을 먹는다. 인근 대학 학생 식당에서였다. 제대로 된 국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내 집밥보다 나았다. 책상이 아니라 식탁에서 밥을 먹는 것은 집밥보다 선진적이었고, 설거지가 내 책임이 아니어서 효율적이었고, 스팀으로 살균된 수저는 한 달에 서너 번 설거지되는 내 수저보다 위생적이었다. 학생들을 위한 복지에 동네 아저씨가 무임승차한 꼴이다. 천 원짜리 아침밥은 수면제가 엉겨 붙은 아침잠을 무지르고 도서관행을 서두르게 만들었다. 지역 주민에게 도서관을 개방해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한데, 아침밥까지, 은혜로웠다.


건강을 위해 저녁을 줄이고 아침을 거르지 말라지만, 대부분 저녁은 푸짐하게 먹고, 아침은 푸대접했다. 아침은 가장 많이 걸러지는 끼니일 것이다. 먹더라도 간소했다. 아침은 맛이나 영양이 아니라 신속성이 미덕이었다. 1992년에 NEXT도 도시인으로서 아침에 우유 한 잔을 마셨고, 28년이 지나서 BTS도 다이너마이틱하게 우유를 마셨다. 습관이 들지 않는 한, 눈 뜨자마자 아침을 먹는 건 쉽지 않았다. 밥 한 술 뜨는 시간에 더 잤다. 그 시간이야말로 잠이 보약이었다. 주린 배 아메리카노로 달래 놓으면 곧 점심이니 문제될 건 없었다.


나는 아침을 먹는 쪽이다. 배가 고프기보다는 나와 맺은 생물학적 계약 이행이었다. 삼시세끼는 문화적 식습관이기도 했다. 엄마의 의지가 반영된 모태 삼시세끼였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 한, 쌀밥 형태로 먹었다. 그런 내게 국을 내주는 천 원짜리 아침밥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아메리카노야 식후 땡으로도 마셔도 유효했다.


첫 천 원짜리 아침밥 메뉴는 콩나물국, 조미김, 김치였다. 2,000원이라도 사 먹을 구성이었다. 콩나물국은 점심시간에 메뉴 무관하게 제공되는 콩나물 목욕하고 남은 물이 아니라, 밥 말기 힘들 정도로 토실토실한 콩나물이 그득한 제대로였다. 조미김은 뜯기 귀찮았고, 김치는 필요 없었다. 밥을 리필까지 해서 후루룩 뚝딱, 아침밥의 이데아가 5분간 명멸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호의를 만나 대접 받는 느낌이었다. 점심이라면 한 끼 때웠다는 생각이 들었겠지만, 아침이라서 그저 든든했다. 남은 조미김은 내 그저 그럴 집밥을 위한 덤이었다. 천 원 덕분에 파는 사람은 적자를 최소화 하며 선행을 실천했고, 먹는 사람은 비굴하지 않을 수 있었다. 십진수의 최소한으로 실속과 체면이 각자의 방식으로 살펴진 것이다.


나는 밥을 먹기 전에 찍은 사진을 엄마에게 보내드렸다. 당신의 유일한 걱정은 내 결혼과 내 끼니였다. 결혼은 당신이 어쩌실 수 없으시지만, 밥상은 택배로 살피셨다. 집에 밑반찬 외에 뭐 먹을 게 있겠느냐는 추측은 타당했지만, 집에서 밥 먹을 일이 드물었으니 걱정은 부당했다. 집 밖에서 당신보다 잘 먹었다. 특히 올해는 월 식비를 작년 상반기 대비 두 배 넘게 썼다. 그렇다고 말해도 당신은 당신이 보내주신 밑반찬 중심으로 내 끼니를 상상하시나 보았다.


“그래도 계란 프라이 하나 없노?”

“천 원에 계란 프라이까지 바라면 도둑놈 아니가?”

“천 원이가? 아이고, 고맙네.”


엄마는 국에 밥 말아 먹기를 잘하는 아들에게 당신 대신 국을 내주는 누군가가 3초쯤 천지신명이셨을 것이다. 혹은 10초쯤, 어쩌면 매일.


매일 국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카레밥이나 짜장밥이 나올 때도 있었다. 콩나물이나 미역이 몸 담갔던 국물이라도 아쉬웠지만, 3분카레/짜장이 800원 안팎인 시대에 더 푸짐한 채소가 들어 있는 데다가 밥/김치가 제공되는 1,000원은 여전히 감사한 일이었다. 고시원 시절부터 신물 나게 먹어 온 3분 카레/짜장을 끊은 지 몇 년 되었다. 그러나 천 원짜리 아침, 집에서보다 잘 먹었다. 설거지 거리가 없는 것만 해도 이득이었다.


식판을 처리하고 나오는 길, 평안했던 아침이 문득, 씁쓸해졌다. 내 배 부르고 나서야 수저와 식기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학생 식당은 넓고 높아 소리가 퍼졌다. 개별 소리들은 엉기고 말고 할 것 없었다. 어차피 같은 소리였다. 쇳소리들은 끝이 뭉개져 듣기 거북하지 않았지만, 거북하지 않아서 스산했다. 사람 소리가 없었다. 묻히는 게 아니라 없었다. 듬성듬성 앉은 학생들은 말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스마트폰을 보며 각자의 밥을 먹었다. 충전 중인 스마트폰처럼, 주유 중인 자동차처럼, 지나치게 얌전했다. 나도 저 풍경의 일부였다니, 그것도 10여 년 이상. 새삼 혀라도 씹은 듯 피 맛 같은 쇠 맛이 났다. 내 쩝쩝대는 소리를 듣느라 저 오래되고 고요한 소란을 듣지 못했던 것이다.


아침은 가장 사적인 끼니다. 점심, 저녁은 공적이든 사적이든 사람과 어울릴 수 있지만, 아침 약속을 잡는 일은 드물다. 10여 년 간, 명절을 제외하면 사람과 먹은 아침은 한 손에 꼽을 듯했다. 작년에 김과 전주에 2박 3일 놀러 갔으니 두 끼는 확실했지만, 나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생략되거나 간소해도 되는 끼니, 생략되거나 간소해도 되는 나. ‘혼밥’이라는 어휘가 생성되기 이전부터 혼밥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아침을 함께 먹을 사람이 없는 것이 의미하는 것을 생각하기를 멈췄다.


식당을 나가면 바로 편의점이다. 야외 테이블에서 여학생이 라면도 없이 편의점 김밥을 먹고 있었다. ‘아니, 왜? 그 돈 들여서 그걸 먹나, 이걸 먹지. 당장 네 아침 사진을 찍어서 부모님께 보여드렸을 때 뭘 더 좋아하시겠니?’를, 10여 년 전의 나와 10여 년 후의 내게 던져 보았다. 아직 대답은 없고, 천 원으로 붕어빵도 살 수 없게 되었다. 올해 3월까지 2마리 천 원을 버티던 붕어빵이 9월 초부터 3마리 2천 원이 되었다. 존엄성의 최소 단위를 충족하기 위해서 사실상 천 원짜리 두 장이 필요한 것이다.


여름에는 토스트를 팔다가 9월 초부터 다시 붕어빵을 팔기 시작한 방글라데시아인 사장님은 여전히 방글방글했다. 타국에서 맞는 당신의 아침은 누구와 함께 할까?


“점심은 단디 챙기라.”

우리 엄마의 말이자 당신 엄마들의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단디’와 당신들의 ‘단디’는 달라질 것이다. 내가 당신들보다 더 비싼 점심, 저녁을 먹어도 나는 천 원짜리 식사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벗어날 생각도 없다. 붕어빵 1.5마리의 아침이었다. 2033년 나는 누구와 아침을 먹을 수 있을까? 글쎄.

이전 12화 엄마의 밥 짓는 소리가 듣고 싶었었구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