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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Apr 11. 2019

혼자 위로하는 아이, 혼자 잠드는 아이

아기가 알려준 토닥토닥과 자장자장의 비밀



어느 날, 시댁에서 놀던 아이가 조카와 부딪혀 넘어졌다. 나는 얼른 아이를 들쳐 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이를 보던 시누이가 한마디 했다.     



"어머, 언니가 해님이를 달래주는 게 아니라, 해님이가 언니를 달래주네요"     



내가 아이를 토닥거리는 동안, 아기도 작은 손으로 엄마 어깨를 토닥이고 있었다.     


 

"해님이가 제가 안아주면 꼭 이래요. 아마 엄마가 하는 걸 따라서 하나 봐요."    


 

해님이가 내 어깨를 토닥이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았다. 태어난 지 몇 개월 되지 않았을 때부터 시작된 습관이었다. 엄마 흉내쯤으로 가볍게 생각해왔는데, 시누이의 말을 듣고 나니 새삼스러워졌다. 아이가 엄마를 달래주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나도 엄마를 달래주고 싶은 아이였다. 작은 사람이었으면서, 엄마 앞에서 늘 큰 척을 했다. 물론 손은 작았고, 힘은 약해서, 아무리 토닥거려도 엄마의 뭉친 어깨에도, 그 아래에 있을 마음에도 쉽게 전달될 리는 없었다.     


엄마는 심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에겐 약한 모습을 감춰야 누구도 만만하게 보지 않는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녀가 꾹꾹 눌러 담았던 스트레스와 울분은 가득 차서 넘칠 때가 있었고, 그건 어린 내게까지 흘러왔다. 어느 날부턴가 엄마의 고통이 내 통점을 통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까지 성가시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살얼음 같은 엄마 마음 판 위를 조심조심 걷게 됐다.     



엄마를 닮은 걸까, 닮아간 걸까. 나도 남 앞에선 잘 울지 않았다. 감정의 둑이 무너져 손 쓸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곤. 힘든 일을 겪어도 가까운 사람에게도 잘 말하지 않았다. 왕따를 당한 날에도 엄마에게 가서 말하기보다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죽여 우는 편을 택했다. 엄마를 위로하는 건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으면서, 정작 엄마에겐 위로를 기대하지 않았다.      



어느 날, 해님이가 떼를 쓰며 바락바락 울고 있을 때였다.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엄마는 강력한 처방이라도 내리듯 아기에게 말했다.     



"울지 마. 울면 바보야."     



낯설지 않은 말이었다. 엄마 인생에 늘 배경음악처럼 울려 퍼지던 주제곡 가사 같은 말이었다. 언젠가 나도 엄마에게 저 말을 들었겠지. "울면 왜 바보야. 아기가 우는 게 당연하지."라는 말이 맴돌았지만, 쓴 약을 머금은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주제곡이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인생에도 울려 퍼지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리면 어린것처럼 맘껏 투정도 부리고, 어리광도 부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참지 말고, 견디지 말고,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살아서, 애어른도 ‘어른 아이’도 되지 말았으면 했다. 쩌렁쩌렁 울면서, 남 앞에서 우는 게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고, 모두에게 알려 주었으면 했다. 엄마처럼, 나처럼 살지 말았으면 했다.     



하지만 아이의 토닥토닥은 무심히 계속되었다. 연민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그 토닥거림은 담백했다. 낮에 토닥거림은, 밤에 자장자장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아기는 좋아하는 인형에게 손수건을 덮어준 다음 손으로 토닥거리며 재웠다. 늘 누군가를 보살피고 싶어했고, 그럴 수 있음을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나는 불 꺼진 방에 혼자 걸어 들어가는 아이를 봤다. 잠들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몰래 들여다보니, 아이는 혼자 이부자리에 가만히 누워있었고, 두 팔은 빼서 이불 밖으로 빼서 이불 덮인 배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엄마가 자장자장 해줄게."     



그때였다. 아이는 자장자장을 하려던 내 손을 툭 쳐서 자기 몸 바깥으로 밀어냈다. 아주 단호한 몸짓이었다. 그리고 아이는 자기 손바닥으로 배를 토닥거리기 시작했다. 자장자장을 스스로 하겠다는 거였다.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아기의 두 눈엔 으쓱함이 담겨 있었다.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아이 옆에 벌렁 드러누웠다. 아기는 아기 이부자리에, 나는 내 이부자리에 누우니 평행선처럼 서로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까만 천장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늘 부르던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섬 집 아기>였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그리고 <섬 집 아기>는 그리 슬픈 노래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아기는 대자연의 보호 아래 고요하고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2절에 등장하는 엄마는, 홀로 두고 온 아이가 걱정되어 굴을 따다 말고 고갯길을 달려온 그녀는, 홀로 잠든 아기의 의젓한 모습을 보고 얼마나 안심되었을까.      



사실 어릴 적 나도 혼자 잠드는 아이였다. 그래도 무서운 꿈에 놀라 깼을 때는 엄마를 찾으러 새벽에 안방 문을 두드렸다. 잠에 취한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끌어안았고, 나는 그 품에 안겨 놀란 마음을 진정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어쩐지 엄마 품에선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이 말똥말똥해지고, 정신은 또렷해졌다. 어느새 엄마의 가슴팍이 좁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엄마, 나 이제 자러 갈래."     



엄마 품에서 벗어난 나는 작은 방으로 돌아왔다. 내 이불 속에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다. 이불은 힘든 일을 겪고 남몰래 눈물지을 때도 나를 지켜준 벙커였다. 이불속에 들어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면, 옆에서 잠든 언니에게 들키지 않고 수도꼭지처럼 마음껏 울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울어도 그 울음이 밤새도록, 또는 아침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어느샌가 울다 지쳐 잠들어 버렸으니까. 깊은 밤 아무도 몰랐겠지만, 나는 밤새도록 나를 달래고, 밤새도록 나를 재운 것이다. 나도 스스로 토닥토닥하고, 스스로 자장자장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만약, 내가 스스로 위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면, 혼자 울 용기도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도움을 청하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는지 몰랐다. 강한 사람 말이다. 



가여운 사람이 아닌 강한 사람.      



그렇게 생각하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강한 사람이었다니. 엄마에게 의지하지 않고, 도리어 엄마를 위로하는 사람이 되려고 했던 건,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강자의 떳떳한 선택이었던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그날의 ‘어른 아이’가 조금 큰 사람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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