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따뜻한 이불을 깔고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봤다. 어쩌다 이 영화를 보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보는 내내 허하던 마음이 차오르고 내가 어릴 적 느꼈던 감각들도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마음 속에서 물기 가득 찬 풀들이 자라나고, 따뜻한 봄밤의 흙처럼 든든한 무언가가 구멍을 메우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나는 스펙타클하지도 않고 긴장 넘치는 스토리가 짜여진 것도 아닌 이 영화를 몇 번이나 돌려봤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는 아침마다 회사를 가는 일이 두 사이즈 이상 작은 구두에 억지로 발을 구겨넣는 것처럼 힘겨웠고, 씻으면서도 싫어하는 동료를 만날 생각에 출근하기 전부터 지쳤었다. 그리고 점점 나빠지는 회사의 분위기도 너무 싫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적응해야 마땅한 의무였다. 회사라는 것이 원래 그런게 아니던가. 그래서 문득 시골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어차피 도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아 그 싹을 가볍게 짓눌렀다. 무엇이든 쉽게 그만둔다는 것이 하나의 열등감으로 자리잡은 나는 어떻게든 직장에서 버티겠다고 다짐했으니까. 하지만 그 생각은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100년 넘은 느티나무처럼 늠름하게 마음속에 뿌리내렸고, 마침내는 울창한 잎을 자랑하며 나를 안달나게 만들었다. 더 이상 미루거나 포기할 수 없도록.
나는 더 이상 지친 일상을 갖고 싶지 않아 시골로 돌아가기로 한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지치게 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한가지 이유만을 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내 마음 안에 있는 지나친 욕심일 수도 있고, 어릴적부터 나를 따라다닌 가난일 수도 있으며, 녹록하지 않은 사회 환경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스펙타클하게 여유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묻는다면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도시를 벗어나 고향인 시골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그 언젠가는 서울생활을 동경한 적도 있었다. 아니, 사실은 어린시절 내내 산너머 산, 그리고 그 뒤 어딘가에 있을 서울을 그리워했다.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항상 그리웠고, 언젠가 내가 원하는 것들이 모두 펼쳐질 곳이라 여겼다. 번쩍이는 야경과 TV에나 나올법한 것들이 현실로 가득찬 곳! 그 곳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고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 될 것만 같았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무척 순진한 생각이었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런 꿈이 있었기에 열심히 공부하고 미래를 기대했으리라.
그러나 열심히 공부해서 올라간 서울은 가난한 젊음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내 몸 하나 눕힐 방을 찾아 반지하와 월세방, 고시원을 전전했고 어떻게든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돈을 벌어야했다. 그 사이 친구들은 집에서 받는 풍족한 돈으로 아낌없이 시간을 투자해 공부했으며, 예쁜 옷을 사고 외모를 꾸몄다. 공부든 외모든 혹은 다른 스펙이든 어느 것 하나 괜찮은 것이 없었던 나는, 그렇게 스스로의 20대를 ‘피 흘리며 겨우겨우 버텨온 날들’이라고 블로그에 적어놓았다.
어쩌면 그때부터 가난해도 비참해지지 않는 시골 생활을 꿈꿨던 걸까? 대학 시절 적은 독후감에는 귀농하고 싶다는 소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도시생활은 충전없이 배터리를 쓰는 일 같아서, 10년이 지나자 힘에 부치기 시작했고 거기서 조금 더 지나자 정말 더는 못 버티겠다는, 모든 에너지가 방전된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도시에서는 일을 하지 않아도 늘 불안했고, 당장 돈이 없으면 굶어 죽는다는 생각이 실질적인 생존을 위협했으므로 스트레스는 디폴트 값이었다.
하지만 시골은 그렇지 않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처럼 산과 들에서 재료를 구해 요리할 수 있으니 생존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이 현저히 적다. 나는 위로 받고 싶었다. 돈이 없다고 차갑게 내쳐지지 않고, 가진게 없어도 크게 티나지 않는 일상을 살며 위로받고 싶었다. 그리고 오랜 도시 생활 끝에 그 답은 시골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미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은 내가 이런 결정이 쉬웠다고 하면 거짓말일 게다. 하지만 더 이상 지칠 힘도 없어 용기를 내 결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용기를 실행에 옮겼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여유롭고 편안한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이 매거진은 10년이 조금 넘는 도시생활을 마치고 시골로 돌아온 30대 여자의 이야기이자, 시골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일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모든 이들에게 돌아올 고향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이들이 시골 생활이 맞는 것도 아니겠지만 놓으면 정말 큰일 날 것 같은 도시생활을 포기해도 이만큼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치는 일에도 지쳐서 더 이상 힘을 낼 수 없을 때, 누군가가 해주길 바랬던 이야기를 나는 해줘야 할 것 같아서. 어딘가에 있을 그 시절의 나같은 어떤 이를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