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애 나눔 농장의 '삼애'이야기

일산을 사랑한 독립운동가 배민수 목사의 삶과 신앙 (5/8)

by 김홍열


5월 8일 농장에는 특별한 일이 없었습니다. 이미 심을 것은 다 심었고요. 양배추도 아무 문제 없이 잘 자라고 있습니다. 물론 사소한 일은 하나 있었습니다. 토마토 모종 네 개 중 하나도 동사한 것 같습니댜. 좀 일찍 심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할 수 없지요. 부지런한 것이 좋은 것은 아니더라고요.


오늘은 삼애 나눔 농장 옆에 있는 삼애 교회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삼애 나눔 농장은 일반인들에게 분양하는 상업적 농장이 아니고요. 교회가 속해있는 법인이 소유하고 있는 여지를 희망하는 교인들에게 경작하도록 해서 그 산출물을 나누어 갖는 일종의 공동 텃밭입니다. 이 교회 이름이 삼애교회이고요. 삼애교회의 삼애는 하나님 사랑, 농촌사랑, 노동 사랑을 의미합니다. 다음은 이 교회에 관한 글입니다. 제가 쓴 글이고요. 교회 창립 10주년 기념 문집을 위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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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애교회의 시작, 배민수 목사 이야기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동에 있는 삼애교회 2층에는 고 배민수 목사 기념관이 있다. 오늘날 삼애 교회를 있게 한 배민수 목사가 실제 사용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몇 장의 오랜 사진들이 벽에 걸려 있다.



그리고 기념관 가운데는 두 개의 유리 상자가 있다. 상자 안에는 국가에서 받은 건국훈장 애국장 훈장이 각각 진열되어 있다. 건국훈장은 일제 치하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고초를 겪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주는 훈장이다. 훈장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은 배민수 목사고 다른 사람 하나는 배민수 목사의 부친 배창근이다.



부자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배창근은 서대문 교도소에서 사형을 당하고 아들 배민수는 평양과 성진에서 감옥 생활을 겪게 된다.


두 사람은 어느 한순간도 독립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평생 독립을 위해 그리고 해방된 조국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다. 두 사람의 이런 신념 내면에는 기독교 신앙이 깊게 뿌리 잡고 있다. 구원과 해방, 예수와 국가는 둘이 아니고 하나였다. 일본 근대 여명기의 개신교 지도자였던 우찌무라 간조의 두 제이제이(JJ, Jesus +Japan)처럼 해방된 조국과 하나님 왕국은 같은 나라였다. 국가 보훈처에 나와 있는 배민수 목사의 독립운동 기록을 보자.


배민수 (1897. 9.2. - 1968. 8. 25.)


충북 청주(淸州) 사람이다. 평양(平壤)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재학 중이던 1917년 3월 장일환(張日煥)·백세빈(白世彬) 등 숭실학교 학생 및 기독교인 등 30여 명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 조선 국민회(朝鮮國民會)를 조직하여 서기 겸 통신원(通信員)의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중략 - 그는 노덕순(盧德淳) 등과 함께 식지(食指)를 잘라 「대한독립」이라 혈서(血書)하고 국민회의 단결과 장래의 활동 방침을 맹약하였다. 그러나 1918년 2월 일경에 조직이 발각되면서 다른 회원 24명과 함께 피체되었다. 이로 인하여 모진 고문을 당하고 1918년 3월 16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함경북도 성진(城津)으로 이사한 그는 1919년 3월 초순 10 여인의 그 지방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그레이슨〔具禮善〕 목사 집에서 비밀리에 회합하여 성진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키로 하고 거사 날짜를 3월 10일로 정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 중략 - 이 성진에서의 만세시위는 함경북도 지방에서의 3·1 독립운동을 촉발하는 뇌관 구실을 하였다. 이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한 혐의로 일경에 피체된 그는 청진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각각 유죄판결을 받았으며,1919년 10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9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배민수는 기독교인 동지, 지도자들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힘든 수감생활을 했지만 늘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애국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나이가 들어 또는 특별한 계기로 변절해 친일에 앞장선 사람들도 많지만 배민수는 어린 숭실학교 학생 시절부터 단 한 번도 자신의 신념과 기독교적 양심을 배반한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평생 지켜야 할 세 가지 교훈이 있었기 때문이다. 배민수에 대한 이해는 이 세 가지 약속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열세 살 소년이 들은 아버지의 유언


위에 잠시 언급된 배민수의 아버지 배창근은 조선시대 마지막 직업 군인이었다. 일제에 의해 조선 군대가 강제로 해산당하자 배창근은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의병 활동에 투신한다. 이후 무장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서대문 교도소에 수감된다. 사형 집행일이 결정되자 가족 중 한 사람에게만 마지막 면회가 허용된다. 배민수의 어머니는 본인 대신 열세 살의 어린 배민수에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오라고 서울로 보낸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는 이제 더는 만날 수 없는 어린 자식에게 세 가지 유언을 한다.


첫째, 네 자신을 잘 돌보아라

둘째, 어머니를 잘 모셔야 한다

셋째, 우리나라를 잘 지켜야 한다. 내가 구하지 못한 조국을 구하고 보살피는 것은 아들인 네가 해야 할 일이다. 네가 내 아들이라면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우리의 조국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국이 독립되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 자유는 없는 거야. 예수님도 네가 나라를 사랑하기를 원하실 거야. 너는 내 아들이니까 너 한 몸의 부귀영화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개인적인 모든 이익을 덮어두고 나라의 주권을 찾기 위해 싸워야 할 때이다.

배창근에게 나라의 독립은 기독교인의 의무였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결코 변절할 수가 없다. 변절해서는 안 된다. 자유를 위해 십자가를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 어린 아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어렵겠지만 배창근은 단호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마디 더 추가한다.


“ 네가 내 말을 다 지킨다면 우리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가 있단다. 내 말을 절대로 잊지 말아라. 네가 내 말을 어긴다면 나는 너를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열세 살 어린 자식에게 아버지는 가혹하게 명령한다. “내 말을 절대로 잊지 말아라” 어기면 용서하지 않겠다!! 배창근의 마지막 희망은 이제 자식뿐이 없다. 자신은 며칠 후면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때 당당한 자식을 보고 싶다. 내가 나라를 위해, 진리와 자유를 위해 십자가를 졌으니 너도 네 한 몸 생각지 말고 예수의 삶을 따라야 한다. 아들 배민수는 아버지의 가혹한 그러나 강렬하고 처절한 유언을 눈물 흘리며 듣는다. 그리고 대답한다.


“ 예, 아버지 절대로 잊지 않겠어요. “


잠시 후 아버지는 일본 경찰에 의해 끌려갔고 어린 배민수는 다시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어린 배민수가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유언을 전해주자 어머니의 말씀 또한 강렬하고 절대적이었다.


“ 너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야 해. 만약 네가 아버지의 당부를 어기고 너 혼자만의 이익을 탐한다면 나는 너를 절대로 내 아들로 여기지 않겠다 “


어린 배민수가 이후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오직 앞으로만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배창근의 마지막 유언이 결정적이었다. 나라의 독립은 예수님의 명령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우리의 조국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리와 자유가 하수처럼 흐르는 해방 조국을 위한 독립운동에 한 평생 헌신하지 못하면 결코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다. 해방 조국과 진리와 자유는 늘 하나였다. 이후 배민수는 해방의 그 날까지 기도하면서 투쟁했고 설교와 강연을 하면서 독립의 필요성을 민중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벼락같이 해방이 왔다.


해방된 조국 그러나 암담한 농촌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은 여러 형태로 진행되었다. 해외에 거점을 두고 무력투쟁을 선도하는 지도자들도 있었고 국내 주요 도시에서 젊은이들을 교육시켜 미래 지도자로 양성하는 운동도 있었다. 배민수는 조만식 선생과 함께 전국을 돌며 농촌 계몽 운동을 했고 이를 통해 조선 독립의 물질적, 사회적, 정신적 기반을 구축하려 했다. 조선 대중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농민들의 생활 조건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판단했다. 농촌 사회에서 오랫동안 내려온 고질적인 악습들을 타파하고 현대적 영농법을 도입해 먹고사는 문제에서 해결되어야 미래와 교육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해방은 되었지만 농촌 현실은 여전히 암담하였다. 해방과 뒤이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국토의 유린, 일제의 수탈 체제가 남긴 후유증, 여전히 남아있는 친일파들의 토지 합병, 고율의 소작률, 비근대적 영농 그리고 무엇보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현실 등 개선을 넘어 개혁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배민수는 해방 초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잠시 정치적 활동을 하지만 이내 농촌 부흥 운동으로 돌아오게 된다. 진정한 해방은 농민들의 삶의 질이 개선되어야 가능하다고 믿어 왔고 이제 해방된 조국에서 본격적으로 실천할 기회를 얻었다. 1953년에 금융조합연합회 회장에 취임해 본격적으로 농촌 부흥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금융조합연합회는 농협중앙회의 전신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농촌 부흥사업을 추진하려던 배민수의 의도는 안타깝게도 이승만 정권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금융조합연합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던 이승만 정권의 하수인들과 갈등을 겪은 후에 배민수는 회장직을 사임하고 농촌으로 직접 들어가 농업지도자 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1957년 기독교 농민 학원을, 1962년에는 기독교 여자 농민 학원을 대전에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농촌 지도자 양성교육을 시작한다. 그리고 1967년 12월 26일 경기도 일산에 재단법인 삼애 농업 기술학원 (三愛農業技術學院)을 설립한다. 이 삼애 농업 기술학원이 오늘날 삼애 교회의 기원이 된다. 일산은 배민수가 1930년대 조만식 선생과 함께 농촌계몽 운동을 할 때 방문한 곳이다. 당시 순수 농촌이었던 일산 조그만 예배당에 와서 배민수는 설교하면서 나중 해방이 되면 이곳에 농촌 지도자 양성을 위한 교육 기관을 설립할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배민수는 일산에 삼애 농업 기술 학원을 세우면서 농촌 지도자가 지켜야 할 세 가지 신념을 구체화하고 이를 학원 명칭에 적시한다.


하나님 사랑, 농촌사랑, 노동 사랑


삼애 농업 기술학원 (三愛農業技術學院)의‘삼애’는 세 개의 사랑을 의미한다. 하나님 사랑, 농촌사랑, 노동 사랑이 그것이다. 이 셋은 어린 시절부터 한평생 배민수의 믿음과 사상을 관철해 온 핵심 개념이다. 하나님 사랑은 어린 시절 어머니 손잡고 새벽교회 다니던 시절부터 한순간도 잊지 않고 지켜온 배민수의 신앙고백이다. 또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씀이기도 하다. 배민수의 자서전 제목 [누가 그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Who Sha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 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배민수는 늘 하늘나라에 대한 강렬한 소망이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배민수의 알파와 오메가였다.


농촌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희망의 공동체를 동시에 의미한다. 일제 식민 치하에서 조선 대부분은 암울한 농촌이지만, 우리가 외면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 될 수 있는 희망의 농촌이다. 해방된 조국에서는 젊은 지도자들에 의해 부국의 토대가 될 그런 농촌이다. 현실의 농촌이고 가능성의 농촌이다. 당연히 사랑해야 할 농촌이다. 예수가 제자를 사랑하고 제자를 위하여 기도했듯이 배민수는 평생 농촌을 사랑하고 농민과 함께 살아왔다. 그리고 실천을 통하여, 교육을 통하여 현실을 가능성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노동 사랑이 그것이다. 배민수는 1968 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노동을 쉬지 않았다. 양복 입고 공식적 의전을 즐기기보다 작업복을 입고 예비 지도자들과 함께 일하기를 즐겼다. 노동이 없으면 농촌을 개혁시킬 수 없다. 노동은 믿음의 실천이고 육화된 신앙고백이다. 노동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 사랑과 농촌사랑은 하나의 완결점을 갖는다.


처음에 언급된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동에 있는 삼애교회는 배민수의 삼애 정신을 계승하고 실천하기 위해 설립된 교회다. 배민수가 1968년 타계한 후 부인 최순옥이 1976년까지 삼애 농업 기술학원을 운영하다가 연세대학교에 재단과 재단이 소유한 모든 재산을 기증하게 된다.



한국 사회가 급속하게 산업화 과정을 겪게 되는 바람에 농촌지도자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격감했고 영농도 이제 과학적 방법론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전문적 교육이 가능한 기독교 대학에 맡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연세대학교에 삼애 농업 기술학원을 기증하면서 원래 기술학원 교사가 있던 자리에 초교파 교회와 배민수 기념관을 설립해 삼애 정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 기증 조건의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교회가 바로 지금의 삼애 교회다. 교회 1층에는 백 명 규모의 예배당과 친교실이 있고 2층에는 배민수 기념관과 교육관이 있다. 배민수 기념관에는 배민수가 사용하던 물품들과 평소 그의 서재에 있던 장서들이 그대로 진열되어 있다.


배민수 목사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간 지도 벌써 50년 가까이 흘렸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세 개의 사랑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계속 영원할 것이고 삼애 교회는 늘 그의 세 가지 사랑을 기억하고 실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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