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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난다 May 19. 2021

우린 모두 '최선'을 다했다

터널에서 회랑으로​

엄마가 일어난 모양이다. 그걸 또 어떻게 치울라고. 맨날 그러는 거면 치우기라도 쉽게 세숫대야라도 가져다 놓을 것이지. 어제 그렇게 맞는 걸 내가 다 들었는데, 어제는 아빠가 더 화가 났던데...울 엄마 아파서 어떻게 해. 살짝 열어본 문틈으로 아까보다 더 역겨운 냄새가 훅 끼쳐 나온다.



“미옥아, 엄마가 미안하다. 엄마가 이러믄 안 되는데...안 되는데...”



바보같이. 엄마. 바보. 나도 몰라. 다 엄마 책임이잖아.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어. 나도 무서워 죽겠다고. 안방 문고리를 잡고 어쩔 줄을 모르는 어린 내 얼굴로 열어놓은 주방 베란다 문에서 찬바람이 훅 불어 들어온다.



그래, 들어가 보자. 들어가자마자 얼른 창문부터 열면 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한번 해보자. 그래도 한 사람은, 아니 딱 한번이라도 엄마를 구해줘야지. 시퍼렇게 멍든 몸으로 때린 남자와 자신이 맞는 것을 끝까지 모른 척 하는 남자의 아이들을 위해 밥을 짓게 만들어서는 안 되지.



심호흡을 하고 가만히 문을 닫는다. 건조대에서 수건을 하나 걷어 찬물로 적신다. 엄마. 문을 열고 들어가 재빨리 창문부터 연다. 냄새는 생각보다 괜찮다. 후~~ 후~ 심호흡, 심호흡. 먼저 모로 쪼그리고 누워있는 엄마의 얼굴에 가만히 찬 수건을 얹는다. 취기가 거의 다 나간 표정에서 묘한 평화가 느껴진다. 이게 엄마의 휴식이었나. 엄. 마. 괜. 찮. 아? 잠시 반응이 없다. 겁이 확 난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일어나봐. 엄마. 미안해. 엄마.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목을 타고 쏟아져 내린다. 엄마, 엄마. 미안해. 엄마. 엄마. 내가 잘 못했어. 엄마, 제발 일어나봐. 엄마. 엄마. 내가 안 그럴게. 엄마의 감은 양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엄마, 아프지? 누워 있어. 내가 치울게. 얼른 나가서 세숫대야랑 쓰레받이를 챙겨 들어온다. 왼손으로 쓰레받이를 잡고 오른 손으로 수건을 쥐어 토사물을 담아 세숫대야에 모은다.



너무 울어서 코가 막혔나. 비위가 약해 냄새만 맡아도 먹은 걸 다 게워내곤 하던 내가 멀쩡하다. 세숫대야를 들고 화장실에 비우고 샤워기로 세숫대야를 깨끗이 씻어서 욕실 벽에 세워두고 방으로 들어온다. 엄마가 일어나 앉아 있다. 엄마, 씻어. 여기는 내가 치울게. 엄마는 손사래를 치며 방바닥에 담은 토사물의 흔적을 이불로 닦아 나간다. 방문을 활짝 열어놓으니 베란다 창과 방 창문으로 맞바람이 제법 세차다. 다시 나가 싱크대에서 수건을 빨아 들어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바닥을 훔친다.



그날 저녁, 퇴근해서 돌아온 아빠가 달력을 흘끗 바라본다. 빨간 색연필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오늘 날짜에 눈동자가 한참을 머문다.



“아빠, 이제 나 달력에 표시 안 할 거야. 아빠도 이제 엄마 그만 때려. 엄마가 술 먹는 거 아빠 때문이기도 한데, 술 먹었다고 때리는 게 말이 돼? 그리고 엄마가 못 배운 게 그렇게 부끄러운 거야? 나는 애를 둘이나 낳고 살면서 아직도 엄마 못 배웠다고, 외할아버지가 돈주기로 한 약속 안 지켰다고 엄마 구박하는 아빠가 더 부끄러워. 알아. 아빠도 힘들어서 그랬다는 거. 그래도 이건 아니야. 가장 가까운 사람을 이렇게 아프게 하면서까지 이루고, 지켜야 하는 게 도대체 뭐야?”



저녁을 먹고 설거지하는 엄마 옆에 선다. 아빠 눈치를 살피며 들어가 공부나 하라는 엄마. 식탁 위의 반찬을 정리해 냉장고 안에 넣고 개수대 옆에 놓여있는 행주를 빨아 들고 식탁을 닦으며 말한다.



“엄마도 잘 들어. 엄마 하나 참으면 모두가 다 좋은 해결책은 없어. 가족은 다 연결되어 있다고. 엄마가 이렇게나 아픈데 아빠가, 또 우리들만 행복한 일은 절대로 안 벌어져. 그러니까 엄마가 진짜로 우리들을 아낀다면 엄마 자신을 먼저 지켜야 해.”



방으로 들어오는 뒤통수로 엄마 아빠의 시선이 느껴진다. 가까스로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다리에 힘이 쭉 풀리며 휘청. 얼른 노트를 편다.



토사물을 치우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쳐. 하지만 아빠, 엄마에게 건넨 이야기는 아무래도 너무 비현실적이잖아. 그 후로 35년간 우리들이 했던 그 모든 선택들의 결과를 다 확인하고야 겨우 알아차린 것을 열두 살의 나에게 기대하다니. 무리지 무리야. 어린 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아빠랑 엄마도 마찬가지다.



변화는 지금 여기 나에서부터다. 내 몸 어딘가에서, 일상 어딘가에서 무한반복 재생되고 있는 엄마와 아빠와 나의 지나온 선택들의 관성을 바꿀 수 있는 존재는 온 우주를 통틀어 오직 한 사람 나뿐이다. 이 때 내 안에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



“미옥아, 네가 해낼 줄 알았다. 축하한다. 그리고 정말 고맙구나!”



“저도 고마워요. 그리고 그동안 바보같이 굴어서 죄송해요.”



“아니야. 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거, 누가 뭐래도 나는 알아. 어느 누구에게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 꼭 해주고 싶었다. 네가 말했던 것처럼 아무도 잘 못하지 않았어. 그냥 우리는 모두 잘 몰랐을 뿐이지. 이제부터 다시 시작인거야!”



“네! 스스로 부족하고 무가치하다는 느낌에 수시로 사로잡히는 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받아들이는 연습부터 시작해 보려구요. 쉽지는 않을 거예요. 너무나 오래된 습관이니까요.”



“그럼 이제 ‘회복수기’를 써서 같은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던 꿈은 정말 포기하는 거니?”



“아마도요. 회복을 위해 정성을 다하겠지만 더 이상 회복수기를 쓰는 걸 목표로 하진 않을 거예요.”



“그럼 이제 뭐할 건데?”



“여전히 앞날이 막막한 저를 감추지 않고도, 저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길을 찾아가게 되지 않을까요? 끌리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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