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시원해라. 이리 살수만 있으면 참 좋겠구나!
미리 계획하고 떠나온 여행이었다면 제주에서 내가 붓을 잡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그림은 나와 상관없는 세계였다. 제주에서 첫 아침을 맞았지만 딱히 할 일은 없었다. 조식을 먹으며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께 몇 가지 관광 코스를 안내 받았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딸아이에게 가고 싶은 곳이 있냐고 물었지만 아이 역시 시큰둥했다. 그렇다면 더구나 무리할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한참 방 안에서 아이가 가지고 온 그림도구를 방 안에 펼쳐놓고 노는 것을 지켜보다가 거실로 나왔다. 모두 저마다의 행선지를 향해 떠난 공간이 고즈넉하다. 얼마나 멍하니 앉아 있었던 걸까?
“정말 안 나가셨네요?”
양 손에 고무장갑을 끼고 거실로 올라오신 사장님께서 물으셨다.
“정말 아무 것도 안 하기로 하고 왔거든요.”
“아이는 뭐해요?”
“방에서 그림 그려요.”
“아이가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는구나. 그럼 정말 괜찮은 곳이 있는데...바다를 보면서 직접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여기서 해안도로 따라 차로 가면 10분도 안 걸리는 곳이예요.”
친절한 사장님, 축 늘어져있는 게스트가 어지간히도 신경 쓰이셨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거실에서 멍 때리며 시간을 보내기로 한 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한 듯 했다. 어차피 딱히 할 일도 없는데 한번 가볼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엎치락 뒤치락 몇차례의 우여곡절을 거쳐 모녀는 그날 오후 ‘성수미술관’이라는 드로잉 까페에 앉아 있게 되었다.
“엄마도 같이 그리자!”
“엄마, 그림 잘 못 그리는데...”
“그래도 같이 그리자, 엄마!”
딸아이가 조르는 통에 하는 수없이 도안을 골라 이젤 앞에 앉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연필이라면 지워가며 하겠지만 대책 없이 물감이라니. 실수하면 고칠 수도 없지 않는가? 어떻게 하지? 에이. 지금이라도 그만두겠다고 할까? 딸아이 앞에서 시작도 못하고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은데...어쩌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그림에 푹 빠져있었다. 아니, 적어도 내 그림을 평가하기 위해 그 공간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같은 도안이 그리는 사람마다 전혀 다른 느낌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어떤 색을 선택하고 어떤 느낌으로 채색할지는 순전히 그리는 사람의 자유였다. 그랬다. 이곳은 선생님의 평가에 따라 성적이 매겨지는 미술수업 시간이 아니었다. 정답도, 우열도 없는 이곳에서 나는 대체 누구의 눈치를 보느라 이리 쫄아 있단 말인가?
그 순간 다채로운 색감의 꽃들이 만발한 꽃밭의 이미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아니, 도안 속의 꽃들이 저마다 ‘나는 이런 색깔로 이렇게 표현해주세요!’하고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물론 그 과정이 마냥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특히 어둠의 대표선수인 검은 색에 대한 마음의 저항은 깜짝 놀랄 만큼 격렬했다. ‘어둠을 표현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지금껏 나를 움직여 온 오랜 믿음이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나는 알아차리고야 말았다. 그 검토되지 않은 믿음이 오히려 나의 삶을, 나의 그림을 취약하고 위험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주범이라는 것을. 그 믿음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멀리까지 갈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 믿음이 사실이라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검은 색 물감을 굳이 생산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알아차림만으로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모험이 필요했다. 나를 가두던 금기를 넘어서는 모험. 그렇다면 그림은 기회가 아닌가. 물도 섞지 않은 검은 색을 듬뿍 머금은 붓으로 첫 꽃잎을 칠할 때의 짜릿함이란! 걱정했던 위험한 일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마음 푹 놓고 진짜 내 그림을 시작해볼까?
검은 색에 대한 금기를 너머서자 이 색은 이래서 안 되고 저 색은 저래서 안 된다며 쉴 새 없이 토를 달던 목소리들은 자연스럽게 힘을 잃어갔다. 그렇게 색감에 대한 판단이 걷히자 가슴 안의 그 풍경을 캔버스로 옮기는 작업에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그렇게 내키는 대로 척척 붓을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내 눈앞에는 나를 닮은 그림이 펼쳐져 있었다. 아, 시원해라. 이리 살수만 있으면 참 좋겠구나!
각자가 그린 그림을 넣은 원통을 둘러매고 바닷길을 따라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는 길, 별빛은 쏟아져 내렸고 우리는 참 많이 웃었다. 이토록 정교하게 겹겹의 우연을 배치해 기어코 내게 붓을 들게 할 만큼 나를 아끼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니 어찌 고맙고 든든하던지 웃다가 자꾸만 눈물이 맺혔다. 왜 자꾸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는 사이 서울에서부터 달고 온 머리 위 먹구름이 조금씩 옅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기분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