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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난다 Jun 04. 2021

나의 현장을 새롭게 느끼는 힘

그저 고요히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꽉 끌어 안았습니다.
몇 시간 떨어져 있다가 다시 보니
모든 것이 다 사랑스럽게 느껴졌어요.


지난주 홈인요가를 처음 만난 여인의 수련 후기 중 한 구절이다. 코로나 덕분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24시간 가정보육의 신세계를 맞은 친구였다. 아이와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너무나 잘 알기에 큰 맘 먹고 내린 결단이었으나, 막상 그녀를 기다리는 현실은 기대했던 기쁨을 누릴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길어진 시간만큼, 그리고 정확히 아이에 대한 사랑의 밀도만큼 엄마로서 자신의 한계와 대면하는 시간도 길고 진해졌다. 어찌 처리해야 할 지 길을 알 수 없는 몸과 마음의 노폐물들이 나날이 쌓여가면서 본래 그녀의 것이었던 자연스러운 ‘생기’의 흐름도 희미해져갔다. ‘엄마, 놀아줘!’라는 아이의 자연스러운 요구가 환청처럼 그녀를 압박해 올 정도라고 했다.


이랬던 그녀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녀는 어떻게 단 몇 시간 만에 다시 아이를 사랑으로 끌어 안을 수 있게 된 걸까? 그녀는 어떻게 자신의 현장을 새롭게 보는 힘을 회복할 수 있었던 걸까? 나는 그것이 ‘인요가’의 혜택이라고 믿는다. 나를 비롯해 인요가를 앞서 체험한 수많은 이들이 그녀와 비슷한 간증(?)들을 돌림노래처럼 부르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요가의 ‘인’은 ‘陰陽’할 때 ‘음’의 중국식 발음이다. (일본에서도 ‘陰’은 ‘인’이라고 발음된다.) 인요가는 인도의 전통요가가 보여주기식 몸만들기 수단으로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요가의 본질적 측면, 그러니까 근원과의 연결을 도와주는 내적 수련으로서의 성격을 회복하고자 한 요가 수련의 한 흐름이다.


동양의 음양의 원리에서 요가의 본래적 목적 복원을 위한 영감을 받은 서양의 요기들이 이런 방향성의 수련에 ‘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인요가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인요가’는 새로운 요가라기보다는 잃어버렸던 요가(여기에서는 인도의 ‘전통’요가 뿐 아니라 각 문화권에서 전해지는 심신수양법을 아우르기로 한다.)의 본질을 되살리자는 요가계의 르네상스 운동인 셈이다.



그렇다면 인요가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기존의 요가와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가장 큰 차이는 ‘정답’이 없다는 것일 거다. 인요가의 아사나에는 정해진 자세가 없다. 오직 명료한 타겟만 있을 뿐이다. 인요가 수련을 하는 현장에서는 같은 시간 전혀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목표가 되는 부분에 적절한 자극을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자세가 사람마다 다들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뼈와 근육이라도 사람마다 그 모양과 밀도가 천차만별임이 해부학적으로 증명된 상황에서 특정인의 몸에 맞는 자세를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은 넌센스가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에게 맞는 자세를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여기가 포인트다. 인요가 수련은 안내자가 제시하는 다양한 옵션을 체험하며 자신에게 맞는 자세를 탐색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몸이 허락하는 가동범위의 경계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탐험하며 지금 이 순간의 자신에게 가장 친절한 자세를 스스로 선택한다. ‘정답’은 사라지고 ‘나의 답’만 남는다.


두 번째 차이는 긴 유지시간이다. 인요가는 강한 자극을 짧게 반복하는 방식의 양요가와는 달리 부드러운 자극을 비교적 긴 시간(보통 3분에서 5분정도) 지속하는 방식으로 수련한다. 그 이유는 인요가가 타겟으로 하는 조직의 특성 때문이다. 양요가가 타겟으로 하는 근육과는 달리 인요가의 타겟인 결합조직(건, 인대, 연골 등으로 이루어진 관절 등)은 부드럽고 길게 지속되는 자극에 더 잘 반응한다.


이런 조직의 성격을 고려하지 않고 강하고 빠른 양적인 자극을 음조직에 가하면 조직에 저항을 일으켜 원하는 변화를 만들어 내기가 어려워진다. 치아교정이나 견인치료의 경우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딱딱한 조직인 치아의 위치와 골격의 가동범위를 변화시키기 위해 강한 힘으로 빠르고 짧은 자극을 반복적으로 주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데는 역시 과학적으로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차이는 내맡김이다. 정성스러운 탐색을 거쳐 자신의 자세를 선택한 이후에는 정해진 시간이 끝날 때까지는 의도적인 움직임없이 찾아오는 경험에 완전히 몸을 맡긴다. 당연히 자세를 유지하다보면 예상치 않았던 불편함과 다른 선택에 대한 미련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처음 선택을 유지하며 자극에 대한 감각의 변화를 온전하게 경험한다.


여기서 예외가 되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자세 중에 손상의 감각이 느껴지는 경우다. 이 경우에는 지체없이 자세를 풀고 이완에 들어가거나 강도를 낮춰 조직을 보호한다. 두 번째는 중간에 몸이 더 열리는 경우다. 자세를 유지하는 도중 몸이 열려 갑자기 가동범위가 넓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때에는 첫 선택에 묶이지 않고 몸의 초대를 받아들이면 된다. 인요가가 자신에게 허락된 몸의 가능성을 충분히 체험하기 위한 수련임을 기억한다면 무리하게 밀어붙일 필요도 없지만 주저할 이유도 없다.


이런 원칙을 기억하며 수련을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바깥으로 향했던 주의가 내면에 집중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내 몸과의 데이트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녀가 자신의 현장을 사랑스럽게 볼 수 있는 힘을 되찾을 수 있게 된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녀는 몸과의 데이트를 통해 자신의 몸 안에서 그녀가 돌아봐주기만 기다리고 있던 생명의 에너지에 접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 있던 것과 연결되는 체험을 한 것이다.


여기에 특별한 기술이나 비법은 없다. 그저 고요히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생기'와 '활력', 다시 말해 사랑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한 누구라도 시도해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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