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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난다 Jun 05. 2021

여한없이 사랑을 나누고 나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

황홀한 일상을 위한 궁극의 수련

온전한 체화 embodiment 란
자신을 통해 표출되는 것이 무엇이든 이를 감싸 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궁극의 수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무한의 존재를 마시게 drink in 되면,
현존이 이루어지며, 광대한 공간성 spaciousness을 확보하게 된다.

리사 카파로의 <소마지성을 깨워라>중에서



카파로 박사가 '궁극의 수련'이라고 표현한 '온전한 체화'를

저는 '삶을 통해 배우기'라고 부릅니다.

좋고 싫음, 이롭고 해로움의 판단없이

내게 오는 모든 것이 나를 성장시키고 성숙시키기 위한 우주의 커리큘럼임을 믿어 보는 겁니다.

어찌 그럴 수 있냐구요?


조금만 주의깊게 살펴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현재의 내 삶을 이루고 있는 그 무엇 하나도 나의 선택으로 인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을요.

내 선택의 기준은 말할 것도 없이 내게 좋고,

유익한 것이었겠지요?

적어도 예상되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명료해집니다.

일상 속에서 나를 불편하게 하고 아프게 하는

무언가가 발견된다면

그것을 미워하고 밀어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성을 다해 살펴봐야 합니다.

분명 그 어떤 순간의 최선이었던 이것을

나는 왜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느끼게 되었는지.


그 것을 처음 맞이했을 때의 마음으로

지금 여기의 그것을 다시 새롭게 만나보는 겁니다.

밀어내고 외면하고 싶은 습관적인 마음을 덜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그것과의 새로운 만남.


쉽지 않지만 한번만 해보면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집니다.

저는 그 맛을 '주도권의 맛'이라고 부릅니다.

삶의 주인으로 사는 맛이니까요.


내 존재의 기반이 되는 공간을 채운 물건들을 하나씩 살피고 비워내는 <공간살림>

이 '주도권의 맛'을 아주 손쉽게 체험할 수 있는 수련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꾸 새롭게 만나다보면

아무 것도 비워낼 수 없어지는 건 아니냐구요?


과연 그럴까요?

보내야 할 것을 보내지 못하는 것은 

'사랑'보다는 '집착'이기 쉽습니다.

여한없이 사랑을 나누고 나면

이별도 사랑의 한 방식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말 새로운 사랑이 시작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뭐가 문제겠습니까?

이미 내게 속한 것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야말로

비움의 궁극적인 목적인 '살림'일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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