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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난다 Aug 22. 2021

'진짜 좋은' 엄마는 '자기'로 사는 엄마다!

'나로 살아가는 기쁨'을 깨워가는 育我휴직 이야기를 열며

제발 무난하게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저항해도 소용없었다. 몸의 신호에 저항할 때마다 삶은 참담해졌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마다 삶은 차근차근 진도를 나갔다. 어차피 막을 수도 없는 것을 뭐 하러 그리 기를 쓰고 버티냐고? 혼자였다면 망설임 없이 몸의 부름에 따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미 엄마였다.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엄마의 세계. 그 세계가 요구하는 '사랑의 기술'은 어렵고도 복잡했다. 엄마가 되어놓고도 여전히 아이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내가 한없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아이를 잘 키워내고 싶은 마음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진심이었다. 두 마음 사이를 오락가락하느라 이도 저도 아닌 채 사는 시간이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딱 10년만 아이를 위해 살아보자고 결심했다. 기왕 엄마가 되었으니 딱 10년간만 아이를 위해 내가 가진 가장 신선하고 빛나는 에너지를 써보자고 마음먹은 것이다. 대신 정말 하고 싶은 일 한 가지는 양보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건 ‘나 자신에 대한 공부’였다. 이는 10년 뒤에는 누가 뭐래도 몸의 부름에 충실한 삶을 살겠다는 약속이기도 했다.

그렇게 10년이 훌쩍 흘렀다. 그사이 ‘나’로부터 시작된 공부는 ‘여성’을 거쳐 ‘인간’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동안의 가장 큰 수확은 나를 겁에 질리게 하던 그 느낌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야성’이라 부른다. 야성은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힘, 즉 훼손되지 않은 ‘생명력’이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 건 내 안의 ‘야성’을 회복해야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나’로 사는데 실패하고 ‘엄마’로 사는데 성공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매 순간 ‘좋은’ 엄마가 아닐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엄마가 정말 ‘좋은’ 엄마다. 매 순간 ‘착한’ 아이가 아닐 수 있어야 정말 ‘착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고서야 스스로의 ‘야성’을 찾아가는 아이의 탐험을 진심으로 응원해주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양육이란 아이가 자신 안의 놀라운 생명력을 탐험하는 과정을 함께 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힘에 안정적으로 접속할 수 있게 되면 아이는 비로소 성인이 된다. 물론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역시 인간으로서 감당해야 할 주요한 과제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이 자신의 과제다. 성인이 된 아이는 스스로 과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그 아이 자신만의 삶을 완성해 나가게 된다. 당연히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시행착오를 할 수 있는 권리야말로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누리는 가장 핵심적인 권리가 아닐까?

'진짜 좋은' 엄마란 아이가 스스로의 삶을 찾아 완성해갈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엄마라고 믿는다. '진짜 착한' 사람이란 신이 주신 고유한 생명력을 자신과 세상을 위해 아낌없이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 '진짜 좋음'과 '진짜 착함'은 세상이 강요하는 ‘좋음’과 ‘착함’의 기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덕목이다. 쉽지 않은 과제가 분명하다. 오직 스스로만이 판단할 수 있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럴 때 어떤 존재가 가장 그리운가? 나는 스스로의 ‘야성’의 부름에 ‘착하게’ 충실한 삶의 본보기가 되어줄 누군가가 너무나 절실했다. 내게 ‘공부’란 바로 이 본보기를 찾아 가르침을 받아 익히는 과정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감히 단언한다.

'진짜 좋은' 엄마는‘자기’로 사는 엄마다!


이 믿음을 얻고 나서야 ‘엄마’로서의 역할과‘나’사이의 갈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외면하던 내 ‘야성’의 부름에 응답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드디어 나를 해방시켰던 자기 탐구와 모험의 과정을 나눌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어떻게 하면 아이를 잘 키우면서도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스스로의 답을 찾아가는 여정 한가운데에서 쓴 현장의 기록들이다. 아무런 보장도 기약도 없는 자기 탐험의 여정을 시작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스승께서 삶을 통해 검증해 물려주신 자기구원의 가이드맵, '영웅의 여정' 덕분이었다.


'영웅의 여정'은  전세계 문화권의 신화 속에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원형적 패턴을 일컫는 말이다. '영웅의 여정'은 기본적으로 현재의 위치를 포기하고 모험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서 어떤 상징적인 목표를 달성한 후에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그 첫번째 단계는 지금 속해 있는 장소나 환경을 떠나는 것이다. 지금의 환경이 너무 힘들고 불편해서 떠날 수도 있고 아니면 모험의 유혹적인 부름에 끌려갈 수도 있지만 어쨌든 주인공은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통해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모험이 시작되면 영웅을 기다리는 것은 '어두운 그림자'라는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다. 그 어둠은 달콤한 유혹자의 모습이거나 무시무시한 괴물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예비 영웅은 그것을 무찌르고 빛나는 보물을 손에 넣어야 한다. 그리고 나면 마지막 관문이 영웅 후보자를 기다린다. 보물을 가지고 무사히 다시 세상 속으로 귀환하면 비로소 진짜 '영웅'으로 거듭나게 된다.


생각보다 사는 게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지도만 잘 따라가면 지긋지긋한 '후보자' 딱지를 떼고 멋지게 영웅으로 귀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그저 살아내기 급급해 언젠가부터 지도따위를 떠올릴 여유조차 없었다. 그렇게 '영웅의 여정'은 내 삶 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는 듯했다. 그러는 동안 '내 삶에 가장 친절한 일, 삶과 상생하는 일'이라는 꿈을 반드시 이루어 내고야 말겠다는 큰소리에는 점점 힘이 빠져 갔다. '주제 넘게 언감생심 영웅을 꿈꾸다니' 하며 스스로를 조롱하고 구박하며 괴로워하던  시간도 짧지 않았다.


그리 우여곡절을 거치는 과정에서 '영웅'이고 뭐고 그저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게 되었을 무렵, 매일 나에게 꼭 맞는 그 일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꿈같은 일상을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나온 궤적을 살펴보다가 내가 통과해 온 그 지난한 방황의 여정이 오래 전 덮어두었던 가이드맵, '영웅의 여정' 그 자체임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물론 '영웅'이라고 해서 지구를 통째로 구할 만큼의 엄청난 업적이나 성과를 이뤄어냈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웅'이란 저마다 타고난 본성을 회복하여 자기다운 삶을 일구어가는 존재를 말한다. 쥐로 살고 있는 쥐, 민들레로 살고 있는 민들레와 마찬가지로 군더더기 없는 '자기'로 살고 있다면, 비록 그것이 헐리우드 히어로물의 화려한 주인공과 전혀 닮지 않았다고 해도 그는 분명 '영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살 수도, 죽을 수도 없어 막막해 하던 워킹맘이 마침내 매일 아침 설렘 속에 눈뜨는 살림명상안내자로 살아가게 는 변신이야기 역시 분명한 '영웅의 여정'이며 또 하나의 깊은 인생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다시 한번 새로운 모험앞에 선다. 오랜 시행착오끝에 비로소 자기 삶의 주인으로 다시 살게 된 여인의 모험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을 15년 전의 나를 닮은 그녀들에게 편지를 띄우기로.


이렇게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막막한 워킹맘에서 지금 여기를 기쁨으로 누릴 수 있는 살림명상안내자까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엄마'로 살아가는 여인이 자기를 기르는 '育我휴직'을 통해 '자기다운 삶과 일'을 일구어가는 이야기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지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면 더 없는 기쁨이겠다.


우리 안에는 아름다운 야성의 힘이 존재한다.

- 성 프란치스코 -


내가 나로서 존재할 때만, 삶은 실재한다.

- 구르지예프 -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기로 선택한 바로 그 것들을 살아야 한다.

- 그렉 브레이든 《디바인 매트릭스》 -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진보란 있을 수 없다

- 인류학자 루이스 리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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