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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생크식 트라우마 탈출법

나는 희망한다. 우리가 '함께' 국경을 넘을 수 있기를...

by 아난다

보낸사람 : Jin 11.08.26 00:00



너무 섬뜩한 글을 읽었다. 차라리 안 읽었으면 좋다는 기분이 든다. 융이 10세경 꿈에서 본 ‘거북머리’를 보고 크나큰 트라우마를 받은 것처럼 심장이 완전히 멎을 때까지 남아 있을 것 같다. 독일어 ‘트라우마’는 ‘트라움’이라는 단어와 비슷하다. ‘트라움’은 영어로는 ‘꿈’이다. 그래서 나는 마치 꿈속에서 이러한 섬뜩한 글을 읽었고, 그 충격이 융처럼 꿈을 깨서도 강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이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화제를 좀 전환해야 할 것 같다. 흔히 사람들은 심장이 멎을 때까지 누구를 사랑하겠다느니 잊지 않겠다느니 한다. 그런데 뇌사라는 게 있다. 뇌사는 말 그대로 뇌가 죽은 것이다. 모든 사고를 하고 몸에 각종 지시를 내리는 뇌가 죽었는데 과연 심장만 살아있다고 누구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데 영어든 독일어든 중국어든 마음은 심장과 관계가 있다. 마음心은 심장 모양이다.



무언가 옛날 사람들은 심장과 마음이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최근 어떤 학자가 심장에도 뇌와 같은 기능이 남아있다고 발표를 했다. 그래서 심장 이식을 했는데 이전사람의 행동과 버릇들이 이식을 받은 사람에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학자는 분명히 심장에 두뇌와 같은 기능이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터무니 없는 얘기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나는 이 이야기를 믿고 싶다. 그래서 나는 내 뇌가 기능을 멈추었어도 내 심장은 멎기 전까지 내 두뇌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 잊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당신을 가슴 아프게 해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좀 더 잘해 줬으면 좋았는데, 후회한 적도 있고 하지만, 다시 우리 부모님에게 아직도 내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과연 재산이 많고 회사 안 다녀도 전혀 생계에 지장이 없었다면 효자였을까? 물론 효자이고 싶지만 아닌 것 같다. 다시 한번 미안하게 생각한다.



나는 결혼하기 전부터 결혼한 사람이 자신의 부모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고 관여하는 것 자체가 싫었다. 배우자에게 모든 것을 쏟아도 모자라는 판에 무슨 양가 부모까지 신경 쓰느냐 하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이런 생각은 지금 좀 달라졌지만, 그래도 나는 모든 것을 제쳐두고 자신의 부모에게 열정을 쏟는 게 아직까지 그렇게 좋아보이진 않는다. (이 내용을 읽고 너무 많이 질책하지 않기를 바래) 나는 기본적으로 훈이든 영이든 결혼 후에 지나치게 나에게 관심을 쏟지 않았으면 한다. 자칫 부부갈등으로 번져서 사이가 멀어지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아직도 고민을 많이 하고 있으므로 결론을 얘기한 건 절대 아니다.



내가 왜 위에서 언급한 생각을 하는가 궁금할 것이다. 알다시피 나는 진짜 가난하게 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당신보다 형편이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학교 다닐 때 부모님 직업 말하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어떤 경우는 솔직하게 말하니까 농담하지 말라고 하는데, 내가 거친 일하는 사람의 자식으로는 안 보이는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방학때만 되면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하는데, 정말 싫었다. 그러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커서 아버지 같은 사람은 안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길은 공부밖에 없다고 느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들 자식들은 부모 일을 잘만 도와준다고. 내가 지금 와서 느끼지만, 내 주위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 중에 나만큼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은 거의 없던 것 같다. 물론 고향 친구 중에는 그런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지만, 서울로 올라올수록 드물어진다.



이렇게 공부밖에 없다는 걸 느끼고 나름대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러면서 부모님이 도와달라는 건 더 싫어지고, 좀 더 효율을 올리기 위해서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공부에 집중, 그러고 나니까 운동에 있어서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영역이 넓어졌다. 술도 남들보다 잘 마시고 싶고 당구도 잘 치고 싶고, 게임도 잘하고 싶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소홀할 수 있는 것은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께 잘해야 되는데, 이건 이상하게 내 머리속에 자리잡히지 않았다. 남들보다 부모님께 잘해야 되는데,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 버린 것 같다. 그 생각이 결혼 후에도 별로 안 바뀐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리 조금이라도 매일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으니 믿어주길 바란다.



나는 ‘쇼생크탈출’이라는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미군부대에서 군복무 할 때 처음 보았는데, ‘4월 이야기’ 다음으로 많이 봤을 것이다. 4월 이야기, 쇼생크탈출 둘 다 주제는 꾸준함과 확실한 계기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이룬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몇 십년간 그런 식으로 벽을 뚫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매일 조금씩 그게 중요하다. 나는 ‘팀 로빈스’처럼 하고 싶다.



그리고 ‘4월이야기’에서 사랑의 힘만 있으면 자신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대학이라도 들어간다는 것도 믿고 싶다.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하고 싶다. 그래서 모든 실망과 원망들을 지워버려야지. 사실 ‘무사시노대학’은 객관적으로 그렇게 유명한 대학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영화중에서는 꽤 유명한 대학으로 나온다. 적어도 수도권 중상위권 대학은 된다는 뜻이다. 이만 줄여야겠다. 그리고 오늘도 벽을 조금씩 파야겠다.



P.S. 요즘 팀 후배가 휴가가서 사무실에선 정말 정신이 없어. 며칠전 보낸 메일(우리는 왜 결혼했을까?)에 이제야 답장을 쓰는 나를 이해해 줬으면 해. 그래도 이렇게 메일로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어서 참 좋다고 생각하고 있어. 당신 메일을 읽으니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그걸 다 전할 수 있는 시간이 없는 게 아쉬울 뿐이야. 그렇지만 좀 여유있게 기다려주면 당신이 내게 물은 말에 하나하나 꼼꼼히 대답해 볼게.



보낸사람 : 미* 11.8.26 15:06



당신이 출근하자마자 컴을 켜고 메일을 읽었어. 어제 밤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는 당신을 보고 어찌나 궁금하던지. 당신도 내 반응이 궁금했던 거지? 전에 없이 8시도 안되어 안부전화를 걸어온 당신의 목소리에서 긴장감을 느꼈거든. ^^



편지를 읽고 깜짝 놀랐어. ‘공대’ 출신인 당신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편견이 산산조각 났다고나 할까. 짧은 시간에 써낸 글이라는 게 믿겨지지가 않을 만큼 좋은 글이었어. 다른 사람에겐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세계적인 대문호들의 글보다 훨씬 더 감동적이야. 우리의 이 편지가 당신 안에 숨어있는 ‘작가’를 깨어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면 나 ‘팔불출’ 인건가?



융의 자서전은 또 언제 읽었던 거야? 그렇지 않아도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어.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당신이 언젠가부터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한 걸 느끼고 있었거든. 당신 내가 읽는 책을 함께 보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당신은 나보다 먼저 내 쪽을 바라보고 다가서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던 거네. 당신. 보여? 나 울고 있는 거. 역시 당신은 나보다 몇 수는 위야. 그러니 내가 어떻게 당신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오늘 집에 오면 당신이 싫다고 할 때까지 꼭꼭 안아줄거야. 사랑해요. 그리고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근데 당신이 충격을 받긴 좀 심각하게 받았나보다. 문체가 완전 달라졌잖아. 뭐 좀 어색하긴 하지만 내용이 내용이었던 만큼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하기로 했어. 하지만 당신도 알고 있지? 내가 아플 줄 알면서도 굳이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이유가 당신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말야. 당신의 글을 읽으니 더더욱 이야기를 꺼내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만약 당시에 서로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면 그렇게 서로를 상처주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함께.



당신이 이야기를 꺼내주니 나도 내 이야기를 할게. 내가 왜 그토록 부모님에게 집착했었는지. 솔직히 내 경우는 거의 최근까지도 나의 어린 시절이 내 사고와 신념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야. 나 자신에 대해 공부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느끼고 있던 것을 작년 여름 50페이지 분량의 개인사를 쓰면서 어느 정도 분명한 그림으로 정리해 낼 수 있었지. 만약 내게 그런 기회가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피해자’ 역할을 고수하며 당신을 비롯한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삶을 축내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런 의미에서 내게 그런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 준 당신이 더더욱 고마운 거고.



당신은 내가 부모님에게 지나치게 신경 쓴다고 했지만 당시 부모님에 대한 나의 감정의 기본은 죄책감이었어. 가족을 위해 헌신하시다가 젊은 나이에 병을 얻으신 아빠, 우리 아빠는 자신이 그 힘든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딸인 내가 뭘 하겠다고 하면 한번도 ‘안 된다’는 말씀을 해본 적이 없는 분이셨어. 아빠가 시한부 진단을 받고 입원해 계신 상황에서 멀쩡한 학교를 휴학하고 ‘재수’를 하겠다고 했을 때도, 아빠의 사업실패로 살고 있던 집까지 경매로 넘어간 어려움 속에서 일본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도 아빠는 철없는 딸의 무리한 요구를 어떻게든 들어주셨지.



물론 내가 그렇게 억지를 부렸던 건 상황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했어. 아빠가 돌아가실 무렵쯤에 모든 상황을 알게 되었을 땐 왜 사실대로 이야기해주지 않은 거냐고 울면서 따져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지금 생각해 보니 부모님께서 일부러 비밀로 하셨다기 보다는 내가 제대로 알려고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 아마 불행한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무서워서였겠지.



하여간 훈이를 임신했을 무렵에야 상황의 심각성을 알게 된 나는 충격을 받았고. 내가 한 잘못들을 용서받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두려움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그런데 당신은 ‘그렇게 부모가 소중하면 아예 결혼할 생각을 말았어야 했다’며 나를 다그쳤던 거지. 당신 말이 맞았는지도 몰라. 사정을 모르는 당신 입장에선 당황하는 게 당연할 수도 있고. 하지만 그때의 난 그런 당신의 마음까지 돌 볼 여유가 없었어. 사랑한다면서 아버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슬픔으로 만신창이가 된 나를 위로하기는 커녕 더 갈갈이 찢어 놓는 당신을 이해할 수도 없고, 또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어.



공부하면서 알았는데 당신 말대로 내가 새로운 가정을 꾸릴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게 맞았더라. 당신과 결혼했지만 당신에게 내어줄 마음의 지분이 없는 상태였으니까. 이걸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원가족과의 개별화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네. 그런데 바로 이것이 고부갈등을 비롯한 세대간 가족갈등의 전형적인 원인이 된다는 거야. 그러니까 ‘모든 것을 제쳐두고 자신의 부모에게 열정을 쏟는 게 아직까지 그렇게 좋아보이진 않는다...그것이 부부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당신의 걱정이 어느 정도는 타당했던 셈이지.



“배우자와의 관계가 여러분의 삶에서 최우선의 고려사항이 아닌 한, 내 생각에 여러분은 결혼했어도 결혼한 상태가 아니다.” 어때? 마음에 꼭 드는 표현이지? 내가 좋아하는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란 사람이 한 말이야. 작년 초 연구원 선발레이스의 첫 책이었던 ‘신화와 인생’이라는 책에 나온 표현인데 솔직히 그때 만해도 이게 뭔 소린가 싶었었지. 그런데 현역 연구원 생활을 마치고, 그러니까 나와 세상에 대한 공부를 1년간 하고 난 후에 다시 읽었더니 그제서야 ‘아~!’ 싶더라구.



ㅋㅋ 볼멘 당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남편이 말할 땐 듣지도 않더니 책에 나온다니까 그제서야 맞다고 한다는 거지?” 에잇!! 그런 거 아닌 거 알면서!! 근데 말야. 책을 질투하는 것만은 좀 참아줬으면 해. 아무리 투덜거려도 당신 부인 사람 만든 건 8할이 책이라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테니까. ^^



또 넘 길어지나?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것도 참 문제긴 하다. 그치? 그래도 읽는 당신을 생각해 간단히 몇 마디만 하고 오늘 편지를 맺어 볼게.



내가 당신의 어떤 면을 가장 존경하는지 알아? 험험. 그래, 물론 다 좋지. 그럼. 하지만 굳이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망설임없이 '탁월한 자기관리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번 목표를 정하면 유난스럽지 않으면서도 꾸준히 실행에 옮겨 반드시 성과를 내고 마는, 당신의 표현을 빌자면 ‘팀 로빈스적 집념’ 말야. 결혼 전에 비해 한치 흐트러짐없는 몸도, 일하면서 틈틈이 외국어를 공부해서 낸 성과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자란 경쟁자들을 넘어서는 역량을 갖출 수 있었던 것도 아마 그 덕이었겠지? 당신 생각해 봤어? 당신의 이 빛나는 장점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지. 그리고 그 엄청난 자산을 물려준 것이 다름 아닌 당신의 부모님이라는 것도.



이제 알겠어? 당신이 얼마나 부자인지. 그리고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지. 그렇게 생각하고 감사하다보면 당신도모르게 당신을 가두고 있는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라는 감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의 영웅 팀 로빈스처럼!!



누구보다 당신을 믿고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이미지 출처 : https://pin.it/1kKVPx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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