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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난다 May 08. 2021

이렇게 살 수도, 죽을 수도 없었던 워킹맘의 선택

글로 만든 삶의 혁명

안정적인 직장과 평화로운 가정은 안팎으로 불안이 넘쳐나던 20대의 나를 지탱해주었던 희망의 빛이었다. 이것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기에 그 치열했던 시간들을 버틸 수 있었고, 10년 후 마침내 그 꿈을 현실에서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꿈꾸던 행복의 조건들을 모두 갖춘 나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을 뽑는 콘테스트라도 있다면 가뿐히 1등이라도 할 자신이 있을 정도였다.


자연스럽게‘도대체 뭐가 문제일까?’라는 질문이 생겼고 답이 될 만하다 싶은 것들은 닥치는 대로 읽고 듣고 실험했다. 그렇게 한동안 좌충우돌하다 보니 명료한 포인트에 이르렀다. 바로 일터를 택한 결정적 이유가 안정된 평생직장이었다는 것 치고는 어이없게도 정말로 평생 다닐 수 있을 만큼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터인지에 대한 고민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자각이었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당시 내 나이는 서른 넷, 뱃속에는 둘째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일단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 버텨보자 했다.


‘이대로 참으며 살 것인가? 이제라도 스스로에게 기회를 줄 것인가?’ 고민은 출산하고 집에 있으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기왕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라면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이었으면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저 재미있기 때문에 했던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도 한가하게 ‘재미’따위를 찾아다닐 만큼의 여유를 갖지 못 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선택에는 늘 이유가 필요했고, ‘효율’이라는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이유를 받아들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들인 비용이 아깝지 않을 만큼의 효과가 입증된 선택이 모이고 쌓여 만들어진 것이 나의 인생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효율 ’이었던 걸까? 누구보다 ‘잘’ 살고 싶어서 이리도 미친 듯이 달려왔는데. 정작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를 물어본 적이 없다니. 가끔 의심스러운 적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골치 아픈 문제에 발목 잡혀있기엔 나는 너무나 바쁜 사람이었다. ‘삶의 이유, 존재의 의미’ 타령하는 건 할 일없는 한량들의 소일거리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혼자라면 ‘어디로든’ 발 길 닫는 대로 내키는 대로 그저 가면 그뿐일지 모르겠지만 난 이제 ‘엄마 ’가 아닌가? 안고 업은 두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한 발짝을 가더라도 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적어도 그러려는 노력정도는 해봐야하는 것 아닌가? 그때 발견한 것이 책을 통해 인연을 맺은 한 저자의 개인대학원 과정이었다.



연구원은 삶의 혁명을 꿈꿉니다.
독서와 글쓰기 수련으로 스스로를 단련하고 재능을 계발할 수 있습니다.
내면탐험을 통해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고 소명에 몰두할 수 있습니다.
사우들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내가 곧 우리이고 우리가 곧 나임을 자각할 수 있습니다.
삶의 혁명을 통해 연구원은 자신의 첫 책을 출간합니다.
책 속에 자신의 삶을 담고, 이 책이 또한 나의 삶을 바꿉니다.
연구원은 자신의 삶과 책으로 세상에 공헌합니다.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 홈페이지 중에서


<익숙한 것과의 결별>에서부터 시작된 스승과의 만남.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지나치게 극적인 드라마였다. 뭔가 속임수가 있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어찌 이리도 마치 나를 위해, 나만을 위해 준비되었다는 듯이 절묘하게 모습을 드러낼 수가 있다는 말인가? 너무나 완벽하게 나를 기다리는 기회에 오히려 겁이 났다. 그래서 어떻게든 나를 진정시켜보려고 애를 써보기도 했다. 하지만 허사였다. 이미 가슴에 타오르기 시작한 ‘아이와 함께 즐기는 세상’에 대한 열망을 도저히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딱 1년만 나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세상이 작당을 하고 나를 속이는 거라고 해도 이번만은 눈 딱 감고 속아주고 싶었다. 실패를 하더라도 100% 실패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있는 힘을 다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 세상’ 하나를 정말로 갖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겠지만 설사 그럴 수 없다고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 세상을 위한 노력들이 ‘쓸 데 없는’ 것이었는지 어쩐지 정도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될 테니까. 그 정도만 되어도 살면서 치루어야 할 번뇌의 절반은 덜어낼 수 있을 테니까. 여기까지 정리되자 자연스럽게 행동이 따라왔다.


그렇게 나는 서른 다섯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무엇을 잘 할 수 있는가? 무엇을 좋아하는가? 내가 꿈꾸는 삶은 어떤 모습인가?'라는 질문과 마주하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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