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은 삶이 아니라, 결이다.
"다음은 100미터 전방. 차량 방지턱입니다. 조심해서 운행하시기 바랍니다."
"응~ 고마워."
운전할 때마다 나는 내비와 이야기한다. 친절하게도 그는 내 생각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어디를 가고 있는지, 내가 어떤 길을 좋아하는지, 내가 못 보는 것까지도 어떻게 알았는지 잘 알려준다.
내가 문을 나서면 그는 기다리고 있다. 차를 타자마자 내게 인사부터 먼저 한다. "알았어, 오늘은 여기로 갈 거야.", "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그와 이야기하며 길을 나선다. 밤에 야간 근무까지 불평하는 법이 없다. 때로는 밤을 꼬박 새워도 여전히 상긋한 인사다.
사람 사는 게 별 것 없지만 생각이 같고 말만 같아도 참 행복하다. 무엇을 보더라도 생각하는 게 같고, 같은 생각은 같은 말로 대화가 이어진다. 대화는 따스함으로 이어지고, 따스함은 다시 포근함으로, 마치 한번 시동 걸린 엔진이 무한 반복하듯이, 이야기는 꽃을 피운다.
퇴근길에 꽃가게에 들러서 꽃을 사가지고 집에 들어간다. 바질, 민트, 로즈메리. 향긋한 꽃 내음이 차 안 가득 풍겼다. 여자는 꽃에 약하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등 뒤에 숨겼다가 그녀 앞으로 꽃을 내민다. 함박웃음과 놀라는 그녀의 모습,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처음 만났을 때 그 미소, 그 얼굴을 가지고 있다. 소녀 같은 감성은 여전하다. "어머!"라는 말은 그녀가 하는 최고의 감탄사다.
꽃보다 더 아름다운 그녀의 웃음에 피로가 풀렸다. 절망이라는 낱말도, 삶이라는 낱말도 그녀의 웃음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한다. 빨간 앞치마를 두른 그녀 뒤에서, 희망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며 내 눈치만 살핀다.
그 맛에 꽃을 사가지고 가는지도 모른다. "어머! 꽃을 좋아하시나 봐요?" 꽃 가게 주인은 매번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 물음에 나는 "예~ "하며 배시시 웃었다. 꽃을 좋아하는 남자가 아니라, 웃음을 좋아하는 남자다.
결만 같아도 괜찮다. 봄에 선선하게 부는 바람을 "봄바람"이라고 말만 해도 괜찮다. 혹 그가 계절을 너무 앞서가서 "가을바람 같다"라고 말해도 괜찮다.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계절은 의미가 없다. 삶에서 계절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일은 없다. '바람'이라고 말만 해줘도 고마운 일이다.
우리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결을 맞추며 사는 것이다. 같이 무늬를 만들고, 날실과 씨실로 베를 짜면서 한 폭씩, 한 단씩, 만들어 가는 것이다. 북이 실 사이로 쏜살같이 지나갈 때 가슴이 덜컥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결이 같으면,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결을 따라서 삶이라는 것이 쌓이고 또 쌓인다.
그러니 흔들리지 않았으면 한다. 희망과 절망이 섞여도 툴툴 털어버리고, 결을 맞추며 살면 좋겠다. 남들 다 나 같지 않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들 역시 당신의 결을 부러워한다. 결을 따라 살다 보면 절망이 희망으로 나타나고, 희망의 결을 따라 다시 살게 되는 것이다.
길을 잘 못 들어서면 "경로를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한다. 바로 앞의 길도 놓치고 못 보는 게 시람이다. 엉뚱한 길로 가더라도 우리가 어느 곳으로 가는지만 알고 있으면 된다. 결은 우리를 바르게 가게 하고, 바르게 살게 한다. 한결이라는 말이 그런 말이다.
빨간 앞치마를 두른 그녀는 나와 결이 같다. 결이 같으니 내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만 보고도 알아차린다. 그 결 때문에 경로를 벗어난 적이 없다. 고개가 나타나면 쉬었다 가자 그러고, 빠르게 걸으면 살짝 잡아당긴다.
우리 인생을 그렇게 살자. 비록 흐트러져도 모양은 잃지 말고, 세월이 흘러 색이 바래도 무슨 색인지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게. 계절은 바람 따라 흘러가지만, 우리는 결에 맞게 굽은 것을 펴가면서 기지개도 켜고 어깨도 펴가면서 어울리는 결을 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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