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선생님, 민수 똥 쌌어요.”
점심시간에는 학교에서 우유와 빵이 급식으로 나왔다. 당시 우리나라는 미국 등 여러 나라와 국제 유엔 아동기금과 같은 단체의 원조에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전쟁 후 초기에는 옥수수, 옥수수가루, 설탕, 보리쌀, 담요 같은 것이 무상으로 배급되기도 했다.
학교 뒤편에는 허름한 창고가 있었는데 학교에서는 그 안에 큰 가마솥을 걸어 놓고 전지분유를 가득 끓였다. 점심시간이 되면 학급 당번들은 큰 주전자를 들고 가서 우유를 받아왔다. 우유는 큰 컵에 가득히 부어서 아이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옥수수 빵과 함께 점심을 먹었는데 옥수수 빵은 탄 냄새가 났지만 점심을 사 오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훌륭한 점심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급식’이라는 것이 생겼다. 급식은 형편이 조금 나은 아이들이 신청해서 먹었는데, 우유는 병 입구가 두꺼운 종이로 동그랗게 막혀 있는 200미리 정도의 투명한 유리병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빵은 속에 팥이 들어 있었고 겉에는 설탕 크림이 묻어 있는 어른 손바닥보다 큰 빵이었다. 마치 밥을 먹기 싫어서 빵을 먹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은 늘 점심때마다 그렇게 먹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친구들 중에는 도시락도 가져오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아이들 도시락은 거의가 비슷했다. 보리밥에 김치, 멸치 볶은 것, 노란 무, 장아찌와 같은 반찬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그거라도 준비해 가면 다행이었다. 고아원 아이들이나 가난한 집 아이들은 그런 도시락도 싸오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아무 말 없이 교실 밖으로 나가는 아이들이 많았다. 나중에 도시락을 먹다 창문 밖을 쳐다보면 운동장에 있는 수돗가에서 물을 먹고 있는 아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로서 배를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이 많았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충분한 영양을 공급해 주지 못했다. 가끔은 보리밥 대신 고구마나 감자를 점심으로 먹기도 했다. 친구들 집에 놀러 가 보아도 밥보다도 고구마나 감자가 더 많았다. 밥 먹으러 가자는 말보다는 고구마 먹으러 가자고 말할 정도였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나면 불안해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몸이 약한 아이들은 점심때 먹은 옥수수 빵과 우유를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끝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앉은자리에서 바지에다 변을 보는 아이들이 생겼다. 미처 화장실에 가기도 전에 실례를 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소화도 잘 못 시키는데 빵과 우유를 섞어 먹으니 장이 탈이 날 수밖에 없었다. 변을 가리지 못한 아이들도 있지만, 자기도 모르게 실수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수업 중에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지린내가 교실에 진동을 하면 아이들은 코를 잡고 자리를 피했다. 그래서 점심시간 이후로는 수업을 하기가 힘들었다.
갑자기 주위가 어수선했다.
“선생님, 똥 냄새나요.”
“어?... 선생님, 민수 똥 쌌어요.”
그러자 아이들이 코를 잡고 뒤로 물러섰다.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민수는 앉은 채로 어쩔 줄 몰라했다. 몸이 약한 민수가 기어코 일을 벌인 것이다. 민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몸이 많이 약했다. 점심시간에 빵과 우유를 채 씹지도 않고 그냥 허겁지겁 먹는 것을 보았다. 금방 배에서 탈이 나고 만 것이다.
선생님은 민수를 천천히 조심해서 수돗가로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 옷을 벗기고 씻기기 시작하셨다. 민수는 그런 선생님에게 미안한지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선생님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손으로 몸을 씻기셨다. 그리고 바지도 물로 씻으셨다. 아이들은 그런 선생님의 모습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반장이 어디서 가져왔는지 바지를 가지고 왔다. 아마도 그런 일 때문에 선생님이 미리 준비해 두신 것 같았다. 선생님은 그냥 웃기만 하셨다. 멀리서 보니 미안한지 민수는 겸연쩍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아이들은 민수와 같은 아이들을 ‘똥싸개, 오줌싸개’라고 놀렸다. 한번 그런 일이 있으면 오래도록 아이들은 놀렸다.
동네 앞을 지날 때 보면 가끔은 오줌을 싸고 대문 밖으로 쫓겨 나와 바지를 벗기운채 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부모들은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혼을 내기도 했고, 키를 쓰고 이웃집에 가서 소금을 얻어 오도록 했다. 이웃집에 가면 얼마나 창피를 주는지 모른다. 다시는 오줌을 누지 않도록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침에 용변을 보려면 동네 뒤편에 있는 공중화장실 앞에 줄을 서야만 했다. 집에 화장실이 있는 집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중 화장실을 이용해야만 했다. 간밤에 속이 안 좋은 사람들이나 설사병이 난 사람들이 아침에 공중 화장실을 이용한다는 것은 고역이었다. 길게 늘어선 줄을 어떻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네 뒷산으로 체면을 무릅쓰고 올라가기도 했다. 체면 차린다고 화장실 앞에서 미련하게 기다리다가는 바지에 기어코 똥을 싸고 마는 것이다. 생리 현상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 때문에 산에서 놀다가 똥을 밟는 일이 많았다.
동네 사람들은 급하지 않으면 순순히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화장실 아래 밑에서는 찬바람이 엉덩이로 사정없이 밀려왔기 때문에 겨울에 엉덩이를 까고 변을 오래 봤다가는 꽁꽁 얼기 십상이었다.
밤에 공중화장실에 가기가 무서운 아이들은 형을 데리고 화장실을 이용해야만 했다. 어두컴컴한데 촛불을 켜고 화장실을 찾거나 호롱불을 켜서 화장실을 찾기도 했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형아 밖에 있나?”
“그래. 빨리 하고 나온나.”
“알았다.”
“형아?”
“왜?”
“밖에 있제?”
“그래.”
가끔 장난기가 있는 형들은 동생들을 놀렸다.
“흐흐흐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
동생들이 기겁을 했다. 용변을 다 봤는지 못 봤는지 부리나케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그렇다고 형들이라고 겁이 없는 게 아니다. 다 큰 애들이 그렇다고 어머니를 데리고 화장실에 갈 수 없는 노릇이다. 만만한 게 동생이라고 동생들을 데리고 똑 같이 화장실을 찾았다. 그러나 동생들도 화장실 안에 앉아 있으나 밖에 있으나 어둡고 무서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형에게 어서 빨리 가자고 보챘다. 그래서 겁이 많은 아이들이 사는 집 부근 언덕 비탈은 늘 용변 본 흔적으로 가득했다.
친구 남철이 아버지는 동네 공중화장실이 다 차면 똥 치우는 일을 하셨다. 집집마다 다니시면서 “똥 퍼?”하고 외치시면서 냄새나는 것도 상관없이 똥 퍼는 일을 하셨다. 우리는 친구 남철이 아버지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똥이 더럽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일전에 서울 사촌이 똥통에 빠졌을 때에도 서슴없이 냇가로 데리고 가서 몸을 씻겨 줬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공중화장실 앞에서 인사를 나눴다. 새벽에 나가고 밤늦게 돌아오는 산동네 사람들에게 공중화장실은 서로 안부를 묻는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