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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림트리 Aug 23. 2020

치매 와중에 들은 할머니의 전남자친구 이야기

할머니의 인생

얼마전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는 1930년대에 태어나 20대에 6.25를 몸소 겪은 분이다.     


옆 건물과 뒷 건물이 폭탄에 으스러지며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았고, 

그렇게 삶에서 마주했던 전쟁의 참상을 자주 들려주셨다. 


할머니에겐 두 명의 오라버니가 계셨는데, 

한 분은 일찍이 병으로 돌아가셨고 다른 한 분은 다니던 경기고에 친구들과 놀러갔다가 

북한군에게 잡혀 총알받이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냐면, 

함께 잡혀갔던 한 아이가 오줌이 마렵다며 북한군 눈을 속이고 죽어라고 달려와 동네에 소식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70대까지도 쾌활한 성격에 넘쳐나는 흥을 주체하지 못해 춤추며 노래부르는걸 좋아했던 할머니. 

즐겁게만 살아온듯한 할머니가 어느 날 오빠들이 너무 보고싶다며 그리움을 표현했던적이 있는데,

당시 10대인 나는 '그리움' 이란게 어떤 감정인지 결코 느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창고에서 발견한 20년전 비디오테이프를 TV로 틀어줬더니

몇날 며칠을 펑펑울면서 고인이 되신 친구들이 너무 그립고 보고싶다며 

두루마리 휴지 여러개를 다 써버린 할머니.. 

그런 할머니를 보며 감정을 전혀 숨기지 못하는 백치미 넘치는 순수한 우리 할머니라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평소에도 애정표현이 넘쳐났다. 

어릴적부터 손자,손녀들만 보면 진하게 안아주고 뽀뽀하며 한가득 사랑을 안겨주셨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를 포함한 할머니의 자식들은 애정표현을 전혀 못하던데, 여전히 내겐 참 미스터리다.)     


당시 대학까지 나와 교편생활을 했고, 언제나 자부심이 있었다.

80대까지 똑똑하다는 말을 듣고 살아온 할머니에게 치매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건 갑자기 어느날부터였다. 

정확히 10월의 어느날 갑자기 함께 사는 둘째 큰아버지를 새벽에 깨워 왜 집에 안가고 여기있냐며 물어보시더란다. 처음에는 장난을 치는줄 알고 웃으면서 대답하던 큰아버지는 실제상황이라는 걸 깨닫고 큰 충격을 받으셨다. 치매 증상은 날이 갈수록 생각보다 점점 악화되었다. 

친척분 말씀으로는, 잠깐 정신이 저 세상에 간 것이니, 이 세상으로 돌아오도록 우리가 계속 말을 걸어드려야 한다고 했다.    


치매증상이 한동안 나타난 후 의식이 되돌아온 어느날, 할머니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보채보았다.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이나 혹시 아무도 모르는 러브스토리가 있었는지 물어보았더니, 

뜻밖의 이야기들이 술술 나왔다.         

 

약 75년전 명동성당 근처는 남학생과 여학생들의 만남의 장소이자 놀이터였다고 한다. 

학교 끝난 후 자전거를 타고 놀러온 남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고무줄 놀이를 하는 여학생 무리에 관심을 표하기도 하였고, 예쁘장했던 할머니는 많은 남학생들에게 고백을 받았다고도 한다.    

  

그 곳에서 당시 전 남자친구(?)분을 처음 만나게 된 건지는 내 기억이 정확하진 않다. 

할머니에게 다가온 그 남자분은 해군 장교였고, 

할머니 말에 의하면 듬직하고 잘생겼고 멋있어서 사귀게 되었다고 한다. 

너무나도 좋아했기에 결혼을 약속했다는 할머니의 말을 한동안 들으며, 난 느꼈다.

약 70여년이 지났으나, 얼굴에서 느껴지는 설레이는 감정을.. 

그리고 여전히 많이 그리워하고 좋아하고 있다는걸.. 

첫사랑을 회상하는 할머니는 너무나 티없이 순수한 그 시절 그대로였다.   

 

어느 날 6.25 전쟁이 터졌고 그는 해군장교였기에 전쟁에 나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동안 소식이 없어 애태우던 어느 날, 전사자명단에 그 분의 이름이 떴다는걸 듣게 되었다. 

할머니는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 그 장소로 달려갔고,

빨간딱지에 “전사”로 표기된 글자를 눈으로 확인하고 주저앉아 엉엉 우셨다고 한다.

몇 달동안 대성통곡을 하며 울어도 그 슬픔은 도저히 가시지 않더라고... 

그 어떤 위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할머니는 당시 20대 초반으로 이미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어야 할 시기였다고 했다. 

결혼을 약속한 사람을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보내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싶었다.

할머니 스스로도 이러다 죽겠다 싶을만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상태까지 갔었고, 

그렇게 시름시름 앓으며 누워있는 할머니를 보다 못한 지인이 새로운 남자분을 소개시켜주었다고 한다. 

결론이 조금 빨리 났다^^

 그 새로운 남자분은 지금 나의 소중한 할아버지가 되었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돌아가셨지만..)

  

“강홍구 (어떤날은 우홍구라고도 말했다고 한다)”

치매 와중에도 할머니는 그 이름 석자를 정확히 기억했다. 


내가 “홍구”라는 이름을 언급할때마다 할머니는 치매와중에도 깜짝놀라 물으셨다. 

“뭐야? 누가 말했어? 너 어떻게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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