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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림트리 Dec 27. 2020

지방사람이 경험한 서울살이

행복은 가장 일상적이고 작은것으로부터 온다는 것

약 14년 전 지방에 살던 우리가족은 서울 한복판 부도심으로 이사왔다. 

아무 준비도 없이 허겁지겁 왔다는 표현이 적절할것같다.

평소 부모님은 ‘언젠가는 서울로 이사가서 살아야하지 않을까’라고 언뜻 생각만 했을뿐 

직장이 지방에 있으니 쉽지 않은일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전화 한 통을 받은 직후, 우린 2일만에 긴급히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서울은 9월 30일까지 그 지역의 중학교에 다니고 있어야 주변 고등학교로 배정됩니다. 10월 1일에 이사오면 아예 타지역으로 배정될겁니다.”     

먼저 9월 30일이 되기 이틀 전, 학생이었던 우리들을 서울 할머니집으로 올려보냈고, 부모님은 한 달간의 시간으로 전세집을 알아보고 이사짐을 챙겨 뒤늦게 올라오셨다. 

오랜기간 지방근무를 하던 아버지는 회사에 요청하여 서울 본사로 운좋게 발령받을 수 있었다.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참 오랜기간 지방에 머물러있었다. 

부모님은 그 때 올라가지 않으면 평생 서울로 갈만한 기회는 없을거라 마음이 급했다고 하셨다.     

바글바글한 가족이 굉장히 좁고 햇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작은 아파트에서 첫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지방의 자가 집을 팔고, 대출까지 받아 마련한 1억 4천만원의 소중한 전세금이 첫 시작이었다. 

   

부유하고 학군도 좋은 동네였기에 아파트 상가는 학원 혹은 부동산으로 뒤덮여있었다. 

학창시절을 보내는 동안 상가만 지나가면 보게되는 **평대 *억 문구는 익숙했다. 

우리 가족들은 돈 몇푼까지 바짝 아끼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 아파트들은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이 몇천만원 혹은 억대로 뛰고 있었다.

 

동네의 아주머니들은 부동산 지식이 탁월했다. 미래를 보는 눈썰미를 갖고 있었다. 

여기저기 집들을 사고 팔며 시세차익으로 수익을 얻거나 혹은 몇 채씩 집을 보유한 알부자들이 많았다.

우리가족은 자연스럽게 그런 사람들을 옆에 두고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을 살게 되었다.   

  

좋은 학군으로 이사왔으나, 부모님의 바람처럼 좋은 대학에 입학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아무 도움없이 우리들은 서울 안의 회사에 운좋게 취직하였고, 

그즈음 (하늘을 치솟는 전세금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이사를 가야했다.

 ‘내가 사는 동네가 제일 좋고 편하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대중교통, 친구 및 지인들, 생활시설 등의 편리함을 떠나 모르는 지역으로 떠나기가 참 어려웠다. 


그래서 집값을 감당할 수 있는 주변동네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신호등 하나 건넌 옆 동네의 위치는 좋았으나, 주변에 유흥시설이 가득한 곳이었기에 사람이 살기에 결코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젠 평수를 줄여서 집을 사야했고 와야했다. 


이사 직후 느꼈던건 두려움과 허탈감이었다. 

부모님의 없는 재력이 아쉬웠고, 삶의 질이 급격히 바닥으로 떨어진 느낌이라 너무 속상했다. 


몇 년을 살다보니 유흥시설이  점점 없어지고 오피스텔이 대거 들어서고 있다. 

가망이 없어 보이던 이 동네가 발전하고 있다. 집값이 많이는 아니지만 조금씩 오르고 있다. 

대한민국의 집값이 들썩이니 잠잠했던 이 곳에도 철썩 파도가 치나보다.  

    

그런 와중에 지방에 살던 친한 지인이 내가 사는 동네의 오피스텔로 이사를 온다고 한다. 

이 동네의 위치가 매우 좋다고 들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집들이를 하기 위해 간 집은 새로 지은 오피스텔이었다. 


집 안을 들어선 난 매우 충격을 받았다. 

짐을 놓을 수도 없는 매우 비좁은 원룸, 그 공간에서는 오로지 2-3명의 사람만 누우면 끝이었다. 

좁고 답답해서 소화불량에 걸릴만큼 작은 공간이었다.     

창문을 열어보니 바로 앞에 또 다른 창문이 있었다. 

뭔가하며 열어보니 앞 건물 창문과 약 10cm정도의 간격을 두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 앞 건물로 충분히 이동할 수 있을것 같았다.   


친구는 이 집을 ‘수면실(잠만 자는 공간)’ , ‘ET집(앞 건물 사람과 서로 손가락을 뻗으면 닿을 집)’이라고 칭했다. 더 놀라운건 그 집의 분양가가 2억이 넘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친구는 서울에 자신만의 공간이 생겨서 무척 행복하다고 한다. 그 모습마저 내겐 쇼크였다.     


어찌보면 내 삶은 서울에 올라온 직후 늘 비교의 연속이었다. 

학벌, 재력, 부가 가득한 동네에서 늘 뒤처진다는 생각을 하며 아둥바둥 살아왔다. 

항상 불만 가득하게 살아온 나의 집이 이제서야 무척 소중해진다. 

창문을 열면 하늘이 보이는 것, 베란다가 있다는 것, 여기저기 물건을 놓을 공간이 있다는 것에서부터,

집 안에서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에 감사함이 느껴졌다. 


늘 위만 바라보며 살아오던 내게,

행복과 소중함 그리고 감사함은 일상에서 온다는것 그리고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 온다는걸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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