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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정 Jul 25. 2023

우리는 무엇으로 슬픔을 무뎌지게 할 수 있을까

-로이스 로리 <그 여름의 끝>을 읽고

  - 소설의 줄거리가 많이 드러나는 글입니다.


 좋은 소설은 긴 여운을 남긴다. 내가 유독 아끼는 소설에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각인된 풍경이 있거나 오래 되뇌었던 문장이 들어 있다. 불현듯 소설 속 장면이나 문장이 떠오를 때면, 순식간에 이야기 속으로 다시 빠져들곤 한다.     


 로이스 로리의 <그 여름의 끝>을 세 번째 읽기 시작했을 때다. 좋아했던 문장이라 여러 번 찾아보았던 구절이 첫머리에 따로 적혀 있었는데, 이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뾰족하기만 하던'이라는 말이 가슴을 쿡 찌르는 것 같았달까.          


시간이 좀 지나면 나쁜 일보다 좋은 일을 더 자주 기억하게 된다. 텅 빈 침묵은 이야깃소리와 웃음소리로 조금씩 채워지고 뾰족하기만 하던 슬픔의 모서리도 점점 닳아 무뎌진다. 184쪽

 - 로이스 리 <그 여름의 끝>, 보물창고


'금을 그은 것은 몰리 언니였다’로 시작되는 이야기. 아빠가 책을 쓰기 위해 잠시 빌린 시골집에서 한방을 쓰게 된 자매가 티격태격 싸우며 소설은 전개된다. 부모에게서 좋은 점은 다 가져가 버려 자신에게는 나머지만 온 것 같다고 여기는 열세 살 메그 눈에는 두 살 위 언니가 너무나 예쁘고 완벽해 보인다. 반면 자신은 ‘경솔하고, 충동적이고, 가끔 아무것도 아닌 일로 화를 내고, 별것도 아닌 일로 괴로워한다’고 여기며 ‘차분하고, 느긋하고, 자신만만하고, 아주 잘난 체’하는 언니와 떨어져 홀로 있을 시간과 공간을 갈망한다. 언젠가 그 시간을 사무치게 그리워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채.     

 그 여름 메그 가족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메그 엄마가 만들고 있는 조각이불처럼 각양각색 다채로운 빛깔과 질감으로 펼쳐진다. 살아가는 일이 다 그렇듯 그 안에는 기쁨과 슬픔이, 새로운 만남과 예기치 않은 헤어짐이 공존한다. 모든 소설은 끝이 나기 마련. 메그의 이야기도 끝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소설이 끝남과 동시에 내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어졌다. 내게도 잊지 못할 ‘그 여름’은 언제였던가 헤아리며 말이다.

 그해 여름,  매그에게는 '잠자는 동안 얼굴 없는 밤손님처럼 소리 없이 찾아와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꿈'(165)이 현실이 된다. 이 소설에는 슬픔의 모서리에 찔려 어쩌지 못하는 메그를 보듬어주는 세심하고 다정한 어른들이 등장한다. 가장 인상 깊은 사람은 윌이다. 윌은 상실의 아픔을 이미 겪은 데다 슬픔에 대처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윌의 집안 풍경을 묘사한 구절은 누군가를 잃은 슬픔을 견디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기억하고 보존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 윌의 아내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손길이 닿은 물건들은 여전히 윌의 곁을 지키고 있다. 두 사람이 함께했던 공간과 시간을 윌이 소중히 간직하며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사진'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먼저 메그가 찍은 사진 한 장. 윌이 눈을 감고 있고 담뱃대 끝에서 나온 가느다란 연기가 사진의 옆을 따라 올라가고 있다. 윌은 구도도, 셔터 속도와 조리개 조절도 최고라고 메그를 칭찬하며 이렇게 말한다.           

“연기는 덧없는데도 넌 그걸 아주 잘 잡아냈고, 그러면서도 얼굴은 또렷하게 나오도록 했어. 정말 멋진 사진이야.” (90)    

 메그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달콤해서 먹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사탕 시럽 같은 무언가가 솟아올라 갑자기 울고 싶은 심정이 된다.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는 진정한 친구’를 얻은 것 같은 소중한 그 느낌. 이후 둘은 함께 사진을 찍으며 찰나의 소중한 순간을 포착해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법을 익힌다. 말로 전하지는 못했지만 마음 깊이 품고 있는, 사랑하고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들을 사진으로 표현하고, 서로의 사진 속에서 그 의미를 읽어낸다.    

   

 만약 내가 들려준 마지막 말이 모나고 날 선 말이라면, 마지막으로 보여준 표정과 행동이 차갑고 불친절했다면, 더욱이 상대가 지극히 사랑하는 이라면 남겨진 슬픔과 회한은 두고두고 얼마나 날카롭게 나를 찌를까. 다행히도 이 소설은 그런 두려움에서 벗어날 장면을 보여준다.

 윌 아저씨는 메그에게 '네 잘못이 아니다'라는, 꼭 필요한 말을 해준다. 그 말 덕분에 스스로를 아프게 찌르던 슬픔의 모서리가 깎여나간다. 울다 말고 마리아 아줌마와 벤 아저씨가 먹던 완두콩 접시를 싹 먹어치우는 메그를 보고 네 사람의 웃음보가 터졌을 때도 슬픔은 조금 뭉툭해진다. 메그는 ‘웃음과 울음이 어떤 때는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친구로 두는 것은 정말 멋진 일'(149)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친구는 누구보다 내 속마음을 잘 헤아려주는 존재가 아닐까. 윌은 메그에게 사진 한 장을 선물한다.    

 

 검고 얇은 액자에 끼운 커다란 사진이었다. 우연의 일치로 나와 비슷하게 생긴 다른 사람을 찍은 사진이 아니었다. 내 얼굴이었다. 내 얼굴이 카메라 앵글에 잡혀 있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꼼꼼하게 잘라 낸 사진의 가장자리 너머, 단단하게 고정된 틀 너머 저 멀리. 목과 턱과 반쯤 고개를 돌린 뺨의 윤곽은 희미하게 배경으로 자리 잡은 소나무 숲과 대비되어 더 뚜렷했다.

윌이 나 몰래 찍은 사진이었다.

...

내 얼굴에 몰리 언니를 닮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 때문에 나는 사진을 보며 깜짝 놀랐다.

내 얼굴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윤곽선, 어두운 나무들과 대비되며 내 이마와 뺨에 흐르는 빛이 만들어 낸 선은 예전에 내가 몰리 언니의 얼굴에서 본 바로 그 선이었다. 어깨를 움츠린 자세도 언니가 하던 그대로였다. 윌은 카메라를 들고 500분의 1초의 빠르기로 셔터를 눌러 그 순간을 포착했고 내 안에 있는 몰리 언니를 영원하게 만들었다. 고맙고 또 기뻤다. 197쪽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이별과 상실의 고통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슬픔의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 윌이 메그에게 들려준 이야기 중에 ‘인간은 결국 시들어가고, 네가 슬퍼하는 것은 마가렛 너 자신이구나’라는 홉킨스의 시가 등장한다. 아내가 떠난 후 슬픔의 시간을 묵묵히 견디는 동안 윌은 깨달았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쁜 일보다 좋은 일을 더 자주 기억하게’ 된다는 것과 ‘텅 빈 침묵’을 ‘이야깃소리와 웃음소리로 조금씩 채워’ 가다 보면 ‘뾰족하기만 하던 슬픔의 모서리도 점점 닳아 무뎌진다’는 것을.

 어린 메그의 뾰족한 슬픔을 가만히 안고 다독여준 사진 한 장. <그 여름의 끝>을 생각하면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장면의 하이라이트다. 몰리 언니를 바라보고 있는 메그. 그런 메그를 지켜보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윌 아저씨. 그리고 윌 아저씨가 꼭 보러 오라고 말했던 용담화가 핀 들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란다. 아마 가장 늦게 피는 꽃이라서 그럴 거야. 또 누가 보든 말든 상관 않고 홀로 자라기 때문이기도 하고.” (200)     


 여름이 끝나가도 어딘가에서는 뒤늦은 여름이 시작되기도 한다. 때가 되면 꽃은 다 지고 없어지지만 또 다른 때를 맞아 외따로 무리 지어 피는 꽃들도 있다. 메그는 여름의 끄트머리에 무리 지어 피어있는 보라색 꽃 앞에서 문득 어딘가에는, 누군가를 위해 '여전히, 아니 언제나 여름인 곳이 있을 것 같다'라고 생각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 윌이 남긴 짧은 한마디는 긴 여운으로 남는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 윌이 메그에게 해준  말이기도 하다. ‘마음속 깊고 깊은 곳에 감춰져 있던 무언가가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고 느끼게 했던 말. 더없이 귀하고 예쁜 존재이면서도 그걸 잘 모르고 있던 메그를 일깨워 준 그 말은 여름이 시작될 때마다 다시 튀어나올지도 모를 슬픔의 모서리를 지그시 눌러줄 것이다.  

   

 메리 올리버의 시 [허리케인]에도 ‘그 여름이 끝나갈 무렵’에 새로 시작되는 일이 나온다.     

....  

나는 내 잎들이 포기하고

떨어지는 걸 느꼈어. 허리케인의 손등이

모든 것들을 후려쳤지. 하지만

진짜 나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들어봐,

그 여름이 끝나갈 무렵

뭉툭한 가지들에서 새잎이 돋아났어.

철이 아니었지, 그래,

하지만 나무들은 멈출 수 없었지. 그들은

전신주처럼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어. 그리고 잎이 난 다음엔

꽃이 폈어. 어떤 것들에겐

철이 아닌 때가 없지.

나도 그렇게 되기를 꿈꾸고 있어.          


 끝인 것 같은 자리에서 다시 출발하거나 모든 게 끝났다고 여기는 순간에 새로 시작된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언젠가는 사라지고 잃게 될 것들에 지레 겁먹을 때면 가만히 눈을 감고 <그 여름의 끝>을 떠올린다.  메그와 몰리, 윌이 서 있던 눈부시게 빛나던 들판으로 향한다.      

‘시간이 흘러도 우리 인생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우리는 묵묵히 살아가야 한다.'에 이어지는 구절에 멈칫한 후, 보름의 시간이 흘렀다. 내내 행간 사이에 머물렀다.

 침묵 속에 조금씩 채워지던 이야깃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등장인물을 따라 울고 웃느라 시간이 더디 흘러가는 듯했다. 그렇게 소설 속 메그의 슬픔이 무뎌지는 사이 소설 밖 현실은 무고한 죽음이 이어지고 참담한 뉴스가 끊이지 않았다. 날 선 나의 마음은 자꾸 날카로워지고 울음 섞인 한숨을 삼킬 때마다 목이 얼얼해졌다.

 2023년 여름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처음 책을 읽은 뒤, 두 해 여름을 더 보내고 나서야 사무치게 와닿았던 문장이 있다. 무언가를 잃고 난 메그가 이제 예전과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에서 끝내지 않고 이어간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는 세상이 있고 그 속에는 좋은 일들도 있다."  (184)     

소설이 끝난 자리에 숙제처럼 남은 '좋은 일'을 어디에서 찾고, 어떻게 이어가야 할까? 우리는 무엇으로 슬픔을 무뎌지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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