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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정 Aug 02. 2023

다큐멘터리 영화를 본다. 비겁한 마음 한 꺼풀 벗으려

다큐멘터리 <수라> 리뷰 2


아는 만큼 보인다. 알게 되면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다. 제주 해녀 이야기 <물숨>을 보고 나서,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숨소리가 "호이"하고 고통스럽게 내뱉는 해녀들의 숨소리임을 알게 되었다. '다큐 3일 ' 에서 택배 기사의 하루를 본 이후 새벽녘이나 늦은 밤 트럭 소리가 들리면 창을 내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간혹 11시가 다 되어 택배를 받거나 저녁밥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에 택배 차량의 열린 문 틈으로 족히 십 수개는 되어 보이는 상자를 보는 날이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혹여 섣부른 연민이나 동정이 실려 있진 않은지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 나는 그저 공손한 시선으로 이웃의 삶에 관심을 두며 조금은 덜 이기적이고 무해한 존재로 살려고 애쓸 뿐이다. 소설이든 드라마든 다큐멘터리든 다양한 삶의 이야기들을 접할 때 결국 그 속에서 나와 무관하지 않은 이웃의 모습, 어쩌면 우리 가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걸 발견할 때가 많아서다.


다큐멘터리만큼 기록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하는 장르가 있을까 싶다. 안정희 작가의 <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에는 '기록되는 삶으로 우리는 다시 존재한다. 개인의 기록이 사회의 기록이 되고 사회의 기록은 다시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마침내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 변화는 새로운 기록을 만들며 우리네 삶은 더 강건해질 것이다.(95)라는 구절이 나온다. 다큐멘터리 <수라>를 보는 내내 '새만금생태조사단'이 만든 자료집들, 황윤 감독이 7년에 걸쳐 찍은 영상 기록물에 깃든 간곡한 마음을 헤아려보게 되었다.

'기록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가늠하고 미래를 잘 살아보려는 의지의 발현'(29)이라는 구절을 다시 찾아보다가 영화의 장면들이 스쳐가갔다.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오면서도 힘이 나는 듯했다.


"열심히 노력하며 살지만 한 걸음도 내디딜 힘이 없는 분들이 보시면 좋겠어요. 내 인생의 가장 힘들고 어려운 어느 날, 제가 해녀 분들에게서 받았던 위로, 바다에서 건져 올려진 싱싱한 날것의 진리를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해녀들의 바다에는 자신의 숨의 길이에 따라 상(上)군 중(中)군 하(下)군의 바다가 정해져요. 누가 정하는 게 아니라 해녀들 스스로 어린 시절부터 바다에서 자라고 수영을 하면서 스스로 자신에게 맞는 바다를 찾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바다의 계급은 타협을 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바꿀 수가 없어요. 자연의 질서 속에 인간이 순응한 질서이니까요. 그런 해녀들의 바다를 보다가 문득 우리 뭍의 세계를 돌아보게 됐어요. "

영화사 '숨비' 대표, 다큐멘터리 감독 고희영 <땡큐,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중에서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 왕복 두 시간이 걸리는 영화관에서 <수라>를 보고 온 이유는 5년 전 읽은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쓴 글을 다시 찾아보았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하는 가난, 차별, 억압, 무관심 때문에 아픈 사람들, 국가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끼거나 존재 자체를 거부당하며 고통받고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책을 읽는 내내 아프고, 괴롭고 막막했지만 멤버들이 가장 많이 한 고백은 이 책이 고마웠다는 거였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살았던 나를 돌아보게 해 줘서, 아픔을 뚫고 나가는 그 길에 초대해 주어서, 이제라도 제대로 알게 해 줘서... 저자가 꿋꿋하게 걷고 있는 길을 응원하며 손잡고 함께 걷기로 다짐한 사람들과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전 반에 나눴던 귀한 이야기들도 공유하고, 어떻게 공감지수를 높여가며 지속적으로 그 길에 동참할 수 있는지 그림책을 보며 자세를 점검하기도 했다. 같은 문제를 사회학자의 눈으로 해석하고 분석한 <아픔이 길이 되려면>과 소설 <피프티 피플>에서 50여 명의 생생한 인물이 그려내는 사회상이 긴밀하게 맞닿는 지점을 비교해 보는 것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오늘의 주제 중 하나가 '책 읽기 방식'이고 융합 독서의 사례로서 손색이 없는 책들이다.


한걸음 더, 조금 더 깊이 알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모임을 마친 뒤 새벽까지 본 다큐 <안녕 히어로>. 책을 읽은 것에서 끝나면 안 된다는 자각에 뒤척이던 밤이 떠오른다.

책을 읽고, 다큐를 보고, 독서 모임에서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한없이 씁쓸해지는 마음이 남았다. 도대체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자괴감과 무력감에 시달릴 때도 많았다. 금방 또 잊어버리고, 모른 척 무심하게 살아가는 내 모습을 마주하게 될 게 뻔해서 지레 마음이 쪼그라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꾸준히 다큐멘터리를 챙겨 본다. 겁을 잔뜩 먹고 사회의 숨겨진 진실을 담은 책들을 읽는다. 그때마다 겨우 비겁한 마음 한 꺼풀씩을 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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