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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정 Aug 02. 2023

당위의 언어 대신 흐르던 검은머리촉새의 낭랑한 노래

다큐멘터리 <수라> 리뷰 5

내게는 수십 개의 새소리 녹음파일이 있다. 이사 온 후 자명종 대신 새소리에 잠을 깨는 신기한 경험을 한 적이 많다. 어느 날은 아주 가까이서 들리는 뻐꾸기 소리에 놀라 깬 후 새를 찾아보려고 뒷산을 헤맨 적도 있다. 지속적이고 규칙적인 소리에 오래 귀를 기울이다 오색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라는 걸 알고 놀라기도 했다. 작년부터는 낭랑한 꾀꼬리 소리에 반해 다양한 톤의 새소리를 녹음하기 바쁘다. 내 마음대로 해석해 의미를 붙여보기도 했다.

<수라>의 첫 장면은 황윤 감독과 승준이 휴대폰과 녹음기를 높이 쳐들고 새소리를 찾아다니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검은머리촉새가 짝짓기 할 때 암컷을 유인하기 위해 내는 소리. 승준이 애타게 찾아 헤매는 이유는 환경부가 멸종위기종으로 분류한 검은머리촉새가 수라갯벌에 서식하고 있다는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서다.

아무리 기다려도 검은머리촉새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미군 전투기의 굉음이 주변 모든 소리들을 집어삼킨다. 그래도 승준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길을 나선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직전 승준이 애타게 기다리던 검은머리촉새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오른쪽 귀에 손을 대고 귀를 기울이는 승준의 손이 클로즈업될 때, 푸르스름하고 보랏빛이 도는 하늘을 배경으로 울려 퍼지는 새소리는 더없이 신비롭고 아름답다,

내게는 가장 감동 갚은 장면이었다. 화면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듯했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모습. 서로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새는 자연의 순리대로 노래 부르고 있었다. 짝을 유혹하기 위해서든, 광활하게 펼쳐진 자연 속에서 제 스스로 흥에 겨워서든 새는 가장 자기 다운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승준은 온 감각을 열어 감응하고 있었다. 조용하고 한적한 갯벌, 굳이 귀 가까이로 손을 모으지 않아도 새소리는 잘 들렸을 테다. 승준은 보이지 않는 새를 소중히 감싸 안기라도 하듯 청명한 소리를 보듬어 귀에 가져다 댄다. 그 짧은 장면 속에는 승준이 걸음마를 시작할 즈음부터 생물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기까지의 시간이 농축되어 있었다. 아빠를 따라다니긴 했지만 스스로 자연의 모든 존재들과 교감을 나누던, 자연의 작은 일부인 한 인간이 서 있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탄식이 나오던 장면. 살아 있어서, 포기하지 않고 그 자리에 가 주어서, 순리대로 짝을 부르는 노래를 잘 불러주어서 '지독히 다행한'(천양희 시집 제목) 일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린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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