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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정 Mar 13. 2020

부풀려진 자아의 바람을 빼고

제자리에 머무는 사람

 2020년 1월, 쉰이라는 나이가 되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독서 모임 일정이 없는 날은 되도록 혼자 시간을 보냈다. 지난 몇 년 간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며 살았다. 그 시간이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돌아보았다. 강의를 들었고, 책 관련 행사를 쫓아다녔다. 독서 모임을 부지런히 열었고, 서점을 돌며 책을 사들였다. 좋은 사람들을 사귀었고, 인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책을 두 권 냈고, 강의를 하게 되었다. 얻고 누린 것만큼 잃은 것도 많았다는 걸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책을 읽을 시간이 줄었고, 시간에 쫓겼다. 성취감에 취했지만 그만큼 공허함에 시달렸다. 보람을 느끼는 만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딜 수가 없었다. 할 일에 치여 헉헉대면서도 수시로 무기력해졌다.


 2019년 7월 두 번째 책을 출간하고 두어 달 부지런히 책을 홍보하고, 북 토크를 열고, 강의를 다녔다. 독자들과 소통하는 즐거움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감동 충만했다. 가을로 접어들 무렵, “연예인을 보는 것 같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인스타그램에 책모임 사진과 꽃다발을 들고 찍은 사진을 기념 삼아 올렸는데, 은연중에 자랑하고 싶었던 속내를 들켜버린 것 같아 부끄러웠다. 소중한 추억을 남기기 위해 남기는 기록이라고 여기면서도 어느새 나를 홍보하고 과시하는 일에 치중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의 피드를 보며 까칠해지는 순간이 있다. 내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을 누리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다. 아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나는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걸 느낄 때도 그렇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먼저 이룬 사람을 보며 열패감에 빠질 때는 또 얼마나 많은지. 치열하게 노력하며 무언가를 (도대체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기다리며 견디고 있지만 점점 더 뒤처지는 것 같아 기운이 빠질 때가 많다. 그런 내가 누군가의 눈에는 '연예인'처럼 보이다니. 축하 사진으로 도배된 그 당시의 나의 이야기들이 누군가의 마음을 쓸쓸하고 허망하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웠다.


 심보선의 책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를 읽게 된 계기는 띠지에 붙은 '질투'라는 말 때문이었다. 흠모하는 신형철 평론가가 쓴 띠지에는 ‘그를 질투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그냥 그를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라고 적혀있었다. 그 문구를 읽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신형철이 질투를? 그런데 질투를 넘어 사랑해 버리면 된다?’

자기 분야에서 똑 부러지게 일을 잘하고, 큰 성과를 내며 돋보이는 행보를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축하해주고 싶으면서도 질투가 난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세간의 말에 동의하고 싶지는 않다. 이기고 싶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아주 미세한 감정의 균열이 생기는 게 문제일 뿐. 겸손한 듯 보이나 은근히 자기중심적인 사람, 이미 출중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 단단하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 곁에는 오래 머물지 못한다. 잘 어울리지도 못할뿐더러 마음의 결을 맞추기도 힘들다. 글에서 만난 느낌과 실제 만났을 때의 느낌이 좀 다른 사람에게서도 슬금슬금 뒷걸음치곤 한다. 지인들의 탁월한 성취에 대해 100% 순수한 마음으로 축하해주지 못하거나 부러움을 넘어 자괴감에 시달리는 나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괴롭힌 적이 많았다. 언젠가 나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질투하지 말고 그냥 확 품어 좋아해 버리자고. 하지만 정말 애정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만 절감했을 뿐이다. 내가 그럴 그릇이 못 된다는 것도.

 어느 모임에서 열패감을 느끼는 순간에 대해 힘들게 얘기를 꺼내 눈물까지 보인 적이 있다. 몇 시간 뒤 그 모임에 같이 참석한 사람이 sns에 남긴 글을 보게 되었다. 내가 결핍감을 느끼는 그 문제에 대해 반대인 상황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글이었다. 정겨운 미담이었다. 그 사람은 결코 나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뿐이다. 그 글을 보며 펑펑 울었다는 사실도, 못난 속내를 드러낸 걸 뼈아프게 후회했다는 것도 그는 알 턱이 없다.

내가 쓴 글이 누군가를 의식하며 쓴 것이 아니어도 예상치 못한 사람의 마음을 헤집어 놓을 수도 있다. 울다 말고 서늘한 자각에 몸을 떨던 기억이 생생하다. 분통 터지는 일이나 속상한 마음을 어쩌지 못해 넋두리 같은 글을 쓸 때도 있는데, 사건의 당사자가 자기 이야기인 줄을 모르고 해맑게 웃는 이모티콘이나 공감의 하트를 제일 먼저 날리기도 한다. 몇 년 간 sns에 글을 올리면서 보이지 않는 벽에 머리를 짓찧는 기분이었다. 관계망이 넓어질수록 관계의 충만함은커녕 헛헛함과 씁쓸함도 커져간다는 걸 알면서도 왜 공개적인 글쓰기를 하기로 마음먹은 걸까?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질질 끌려가는 것에 지쳐갈 무렵 관계를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출판사, 서점, 작가들 팔로우를 취소하고 새 글 알람을 끄기 시작했다. 온갖 소식을 보며 여기에도 가야 할 것 같고, 저 행사에도 참석해야 할 것 같은 조급한 마음이 사라졌다. 인기 있는 강좌 소식이나 화려한 모임 후기들도 일일이 챙겨보지 않으니 시끄럽던 마음이 고요해졌다. 유명세를 떨치고 인기가 치솟는 강사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안 보면 그들도 안 보는 게 당연하구나, 수긍하게 되었다. 날마다 찾아와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공감 버튼 하나, 댓글 한 번 달지 않아도 나를 응원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누군가를 의식하며 쓰는 글이 아니라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면서 마음의 여유를 찾으려 애썼다.


혼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사람들과 거리를 둘수록 나의 부풀려진 자아가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아가는 느낌이 들어 안도했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아끼고 좋아해 주는 사람들을 가만히 기다리는 시간이 좋다. 이제는 남의 울타리를 기웃거리며 쓸데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제자리에 머무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찾아오는 이들이 다가와 편안하게 말을 걸 수 있도록 적절한 높이로 담장을 둘러치고, 울타리 주변에는 꽃도 심고 나무도 심어 열심히 가꾸면서 말이다.

 오늘도 여전히 SNS라는 울타리에 내 삶을 맞대 놓고 살아가는 중이다. 내 일상의 모습을 공개하며 그날그날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쓴다. 부풀려진 자아를 눌러 바람을 빼고 진솔하고 성의 있게 일상을 일구는 모습을 기록한다. 이제는 방만한 시선을 거두어 내 안을 향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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