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카톡이 ‘카톡’ 하고 울었습니다. 보나 안 보나 남쪽에 친구들 일 터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노란 산수유꽃 앞에서 희야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올라왔습니다. 경쟁을하듯 진달래꽃 앞에서 환하게 웃는 영이 사진도 올라왔습니다. 장소는 다른데 꽃 앞에선 배우들의 표정이나 몸짓은 둘 다 똑같습니다. 얼굴을 활짝 핀 꽃가지에 바싹 디밀고,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만들어 들고, 의기양한 표정이었습니다. 보나 안 보나 카메라 앞에서 “하나, 둘, 셋!”하고 숫자까지 세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풍경은 해마다 한결같은지 나도 싱겁게 웃고 말았습니다.
산책길은 어느덧, 대나무 길을 걸어갑니다. 갑자기 환해지며 분홍빛 진달래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몽글몽글 이제라도 와르르 필 것 같은 진달래 봉우리 사이에서 진달래꽃이 딱 한 송이 피어 있었습니다. 다가가면 손 끝에 닿을 것 같은 위치에 진달래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바람은 투명하고 하늘은 눈부시게 파란데 그 하늘 밑에 진달래꽃 한 송이 핀 것입니다. 걸음이 저절로 빨라졌습니다. 어차피 보게 될 진달래꽃인데도 빨리 가지 않으면사라질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빨리 걸으며 흥얼거렸습니다.
“연분~~~ 홍 빛 치마~~ 가 바람에 흩날리더라~~~ ”
나도 모르게 노래가 나와 흥얼거리는데 엄마 모습이 떠 올랐습니다. 검정 몸빼 바지를 입고 머리 위에 무거운 나뭇짐을 이고 산모롱이를 돌아오시던 엄마의 모습이었습니다. 해뜰 때 집을 떠나서, 해 질 무렵 돌아오시던 엄마의 커다란 나뭇짐 위에서 분홍빛 나비 떼가 나풀나풀 춤추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보이지 않고 노을빛 속에 분홍빛 나비 떼만 보였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유년 시절, 어느 집이나 아궁에 불을 지펴 밥을 하고 찌개를 끓이고 방을 덥혔습니다. 엄마가 머리에 이고 온 나뭇짐은 소갈비(마른 솔잎의 강릉쪽 사투리)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대나무 갈쿠리로 긁어모아 푸른 솔가지를 꺾어 바닥에 늘어놓고 그 위에 긁어모은 마른 소갈비를 올려놓고 둥글게 말아 묶어서 머리에 이고 오시곤 했습니다. 이것들은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불쏘시개로 요긴하게 쓰이곤 했습니다.
몇 십리 길을 걸어 엄마 키보다 더 크게 나뭇짐을 해 오셨으니 그 힘든 과정이야 지금의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힘든 어려움이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느 봄 날, 소갈비를 대나무 갈쿠리로 끌어 모우다 양지쪽에 곱게 핀 진달래꽃이 엄마의 눈에 들어왔을 겁니다. 소갈비를 긁다 말고 엄마는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진달래꽃 곁에서 한참을 행복하셨을 겁니다. 그러다 혼자 보기 아깝단 생각이 드셨겠지요.
결국 그 무거운 나뭇짐에 진달래 꽃가지를 더하여 집으로 돌아오셨을 겁니다. 오시면서 힘든 줄 모르고 진달래꽃이 나뭇짐 위에서 나비 떼처럼 춤출 때마다 엄마 발걸음도 다른 날 보다 가벼웠겠지요. 집에 돌아오시자 온몸에 붙어 온 검불도 떼지 않고 빈 소주병부터 찾았을 겁니다. 그 빈 소주병을 정갈하게 씻고, 맑은 물을 담아 진달래꽃을 꽂아서 마루 한쪽에 올려놓으셨습니다. 그리곤 아마도 흐뭇하게 진달래꽃을 바라보며 웃으셨을 겁니다. 다른 가족들도 그렇거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힘들게 사시면서도 엄마도 꽃을 보면 아름다움을 느꼈고, 봄이 오고 꽃이 피는 걸 반가워하던 여자였던 겁니다. 우르르 몰려오는 봄날 앞에서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한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