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쇄골은 어떨까
“나는 Y의 욕망의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알아보았다. 그러자 Y는 내게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으로 여겨졌고, 나는 그를 더 이상 공포 속에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 관대하게 사랑하게 되었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 진다. 그녀의 쇄골은 어떨까. 그녀 침대의 이불은 어떤 디자인일까. 그는 어떤 책을 읽을까. 그의 등은 어떨까. 그녀의 소망은 무엇일까. 그녀가 좋아하는 구두는 어떤 스타일일까. 그의 연봉은 얼마일까. 그의 향기는 어떨까. 그녀의 유년 시절은 어땠을까. 오늘 낮엔 무엇을 먹었을까. 누군가에 대해 깊이 알고자 하는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과 거의 유사하다고 해도 큰 논리적 문제는 없다.
그래서 처음 사랑에 빠지면, 그와 하루 종일 편의점 파라솔 아래서 시간을 보낸다 할지라도 지루하지 않다. 그리고 그의 sns에 기웃거린다. 알아야 할게, 알고 싶은 게 많으니깐. 그런데, 이 행복하고 신비로운 감정은 동시에 불행하고 단조로운 미래를 암시한다.
부부는 말할 것도 없고, 오래된 연인은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한다. 쇄골은 지겹도록 봐왔고 쇄골보다 더 깊숙이 감춰진 곳도 이제 궁금하지 않다. 그의 (안타깝지만 이루기 쉽지 않을 것 같은) 소망과 희망에 대해선 지겹도록 들었고, 그녀의 구두는 지겹도록 봐왔고 일부는 내가 사주었다. 물론 그녀 침대의 이불은 빤 지 오래돼서 좀 쾌쾌하다는 것도 그녀 자취방에 가본 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사귄지 빠르면 일 년, 또는 그 이상이 되면 (편의점 파라솔은 이미 갈 생각이 없고) 레스토랑 코스 요리 앞에서도 할 말이 그리 많지 않다. 지금 눈앞에 나오는 음식 이야기, 분위기, 혹은 어제 갔다 온 친구 결혼식 이야기만 주섬주섬 늘어놓을 뿐이다. 이제 더 이상 서로에 대한 이야기는 할 것도, 할 필요도 별로 느끼지 않는다. 물론 그와 그녀의 sns에 여전히 기웃거리긴 한다. 어떤 놈팡이가 집적거리진 않는지, 혹은 언년이 꼬리 치고 있지는 않은지.
누군가를 멀리서 보고 있을 땐 좋았는데 막상 가까워지고 나니, 심드렁해지는 경우 가끔 있지 않던가. 그렇게 나를 쫓아다니던 남자친구가 하룻밤의 잠자리로 내게 덤덤해지는 경우 또한 흔치 않던가. 그러니까 그녀를 알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은 당신을 내 사랑에서 점점 몰아내겠다는 의도와 다르지 않은 것이 되었다. 물론 의도하지 않았지만.
사랑에 빠진 모든 사람은 두 갈래 길이 벌어지는 곳에 서있다. 다만 한쪽 길만 보일 뿐이다. 머지않아 닥쳐올 검은 미래를 미리 상상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낱낱이 알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그럭저럭 안다는 생각이 들 때쯤엔, 권태와 의무감과 (가끔) 애틋함이 남아 있을 뿐, 애초에 가졌던 그에 대한 욕망은 더 이상 찾기 힘들다. 어쩌자는 것인지.
몇 가지는, 내가 알 수 없는 그녀의 몫으로 남겨두는 일도 필요하지 않을까. 난 어차피 그녀의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알고 싶은 욕망만 가득할 뿐. 사랑하기 때문에 알고 싶지만 사랑하기 위해서 당신을 모를 필요도 있다.
근본적인 방법은 없을 것 같다. 이건 숙명적인 사랑의 역설이자 비극이니깐. 다만 유예의 방법은 있을지도 모른다. 가령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않는 것. 다치니깐. 그렇다고 신비주의 전략을 구사하자는 것은 아니다. 연애 초기에 적절히 구사해야 할 방법을 몇 년 동안 구사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그와 그녀에게 진저리 치며 헤어지자고 할테니깐. 다만 연인들이 종종 상대방의 휴대폰이나 sns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들춰보고, 심지어 서로의 약속과 동선까지 공개하는 연인 어플 같은 것까지 깔아 서로의 사랑을 증명해보려는 행위가 서로의 사랑을 더 빨리 제거하는 일이 될 가능성도 동시에 높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은 중요하다. 낭만주의적 사랑의 신봉자들은 본능/감정대로 사랑을 하자고 외치지만, 사랑은 다른 무엇보다 더 깊이 배우고 숙고하지 않으면 더 큰 상처만 남고 실패만 안겨줄 뿐이다. 그리고 결국 우리 사회에 사랑 불신자들만 양산할 뿐이다.
오래된 연인(혹은 부부)이라면, 많이 알려는 시기가 지나면 되도록 모르려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건 상대에 대한 무관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관심이 없어서 무심하자는 게 아니라, 관심을 갖되 내가 그의 모든 것은 알 수 없다는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한다. 대개 (처음엔 긍정적이었던) 낱낱이 알고자 하고 하는 마음이 어느 순간 낱낱이 통제하고 싶은 마음으로 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를 구속하게 되고 억압하게 된다. ‘알고 싶다’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 ‘사랑’이라는 이름 대신 ‘억압과 구속’이라는 이름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그를 알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내 사랑이 그를 구속하지 않기 위해서는 때론 모를 용기가 필요하다. 몇 가지 정도는 알 수 없는 존재로 그녀를 내버려 두는 것도, 그에게 내가 알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도 사랑에 있어선 필요한 일이지 않을까. 그래서, 난 알고 싶은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녀를 모르기로 했다.
“우리가 사랑하길 멈출 때, 사랑했던 사람은 이전과 똑같은 사람이건만, 우리에겐 그가 더 이상 똑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불가사의한 매력의 베일이 벗겨졌고, 그래서 사랑은 사라져 버렸다.” - 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