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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바다 Jul 11. 2016

최초의 선물

'있어주는 것'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 한강


가까운 누군가가 아픔으로 병원에 있을 때, 우리는 그 침상 곁에 한두 번쯤은 있어보았다. 소독약 냄새, 무거운 공기, 희미하게 들리는 신음소리. 적막, 어떤 적막. 거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통을 줄여 줄 수도 아픔을 낫게 해줄 수도 없다. 그저 거기에 있는 것 밖에는.       


점점 말할 수 없는 한 여자가 있다. 출판사에서 일했고 수도권 두 대학과 예술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강의했던 여자. 진지한 시집 세 권을 묶어냈고, 서평지에 칼럼도 기고했던 여자.  누구보다 예민하게 언어를 사용하고 느꼈지만 막상 언어의 감옥에 갇혀 문득 말을 하기가 힘들어진 여자. 그녀는 언어의 한계와 언에가 내재한 근원적인 폭력성으로 점점 말을 잃어갔다. 처음은 아니었다. 열입곱 살 때 한 번 그런 적이 있었다. 그때, 낯선 언어(불어)가 그녀를 건드렸고 그녀는 ‘퇴화된 기관을 기억하듯’ 다시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실어증을 치료하기 위해 그녀는 낯선 외국어, ‘희랍어’를 배운다.


점점 볼 수 없는 한 남자가 있다. 독일에서 고대 희랍어와 철학을 전공한 남자. “세계는 환(幻)이고 산다는 건 꿈꾸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남자. 플라톤의 관념(이데아)을 탐구하며 세상을 살펴보지만 막상 제 세상을 보지 못하는 남자. 두껍지만 무기력한 안경을 쓰고 희랍어 강의를 하는 남자. 그는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점점 실명이 되어 간다.


한강의 소설 《희랍어 시간》에서,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한 남자가 만났다. 그런 그들이 만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서로의 존재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던 어느 날, 남자는 어두운 건물에 들어온 새를 구하려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만다. 상처를 입고 안경이 깨진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볼 수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간절하게 누군가를 요청하는 일 밖에 없다.   


… 누구 없어요?
거기 누구 없어요?


‘누구 없어요’라는 말은 ‘도와주세요’라는 말과 다르다. ‘누구 없어요’라는 말은 단지 도움만을 요청하는 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어떤 ‘존재 자체’를 요청하는 일이다. 그때, 말하지 못하는 그녀가 그의 곁에 나타났다. 말할 수 없는, 그녀는 떨리는 검지손가락으로 그의 손바닥에 또박또박 ‘말을 썼다’.


먼저

병원으로

가요.


우리는 타인을 부른다.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절박함으로 타인을 부른다. 그리고 타인은 그 요청에 응답하며 우리 곁에 있어 준다. 말의 세계에서 멀어졌던 한 여자가 보지 못하는 한 남자의 말 걸기에 응답하며, 실어(失語)와 실명(失明)의 사이에서 그들은 만났고 함께 있어주었다. 그리고 종내 사랑을 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사랑이란, 보거나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감각하고 닿는 일, 즉 있어 주는 일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가장 부드러운 곳을 찾기 위해 그는 눈을 감고 뺨으로 더듬는다. 선득한 입술에 그의 뺨이 닿는다. (…)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는 입맞춘다. 축축한 귀밑머리에, 눈썹에. 먼 곳에서 들리는 희미한 대답처럼, 그녀의 차가운 손끝이 그의 눈썹에 스쳤다 사라진다. 그의 차디찬 귓바퀴에, 눈가에서 입가로 이어지는 흉터에 닿았다 사라진다.


부재에서 존재가 생겨났다. ‘사랑’이라는 무엇이 그들의 잃은 것들 사이에서 생겨났다.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사랑은 반드시 서로 보거나 말해야만 가능한 무엇은 아니었던 셈이다. 무엇보다, 사랑은 서로 더듬거리며 있어 주는 것이었다.   

'있어줌.' 이 말에서는 '있음'과 '줌', 다시 말해 '존재'와 '선물'이 일치한다. 독일어에서는 '무엇이 있다'는 말을 'Es gibt~'라고 한다. 여기서 'gibt'라는 동사는 '주다'는 뜻의 'geben'에서 온 말이다. 그러니 '있음'이 곧 '줌'이다. 존재가 선물이라는 말.
- 고병권, 《철학자와 하녀》


그러니까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은 그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있음’을 ‘주는 것’이다. 내가 힘들 때, 당신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어떤 말을 건네도 당신의 말이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나의 힘듦과 아픔을 줄여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말 이전에 이미 당신은 내 곁에 있다. 그리고 나는 당신 곁에 있다. 간절한 나의 요청을 당신은 있어주는 것으로 이미 응답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말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있어 주면 된다. 이미 당신은 내 곁에서 자신을 선물로 내어 주고 있었으니까.      

Edvard Munch, Towards the Forest II, 1915

북구의 어두운 숲. 그 숲을 앞에 두고 연인이 서있다. 저 숲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들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숲의 깊은 음영만큼 그들은 불안하다. 하지만 연인은 꼭 끌어안고 있다. 여자는 남자의 허리에 남자는 여자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고개를 기대며 서있다. 그들이 불안의 숲 앞에서 알 수 있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을지라도 그들은 함께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있다.  자신을 내어 선물하고 있다.


당신이 힘들거나 외로울 때 나는 얼마나 있어 주었는지. 그리고 또 힘들 때 있어준 당신에 대해 나는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그저 나의 힘듦과 괴로움만을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닌지. 당신이 말없이 ‘주고 있는’ 선물을 나는 받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아니, 당신이 내게 선물을 주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닌지.      




‘사랑이 무엇이다’라고 정의할 수는 없지만, 무엇을 잃어가는 내 곁에, 그리고 당신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전까지 내게 없던 당신이라는 존재가 내 옆에 있는 것, 절박한 요청을 외면하지 않고 내 곁에 있는 것, 말 그대로 그저 ‘있음을 내어 주는 것’.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받은 최초의 선물,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준 최초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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