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우정 사이, 고민하는 당신에게
어린 왕자가 여우를 만난 별은 ‘아주 메마르고 아주 날카롭고 아주 가혹한 별’이었다. 그 외로운 별에서 어린 왕자는 말했다. “난 외롭다.. 난 외롭다... 난 외롭다...” 하지만 말해도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때 어린 왕자는 여우를 만났다.
"넌 누구니?" 어린 왕자가 물었다. "정말 예쁜데..."
"난 여우야." 여우가 대답했다.
"이리 와 나하고 놀자." 어린 왕자가 제안했다. "난 정말 외롭단다..."
"난 너하고 놀 수 없단다..." 여우가 말했다. "난 길들여지지 않았거든."
"<길들인다>는 게 무슨 뜻이니?"
"그건 <관계를 맺는다>라는 뜻이야."
"관계를 맺는다?"
"그래." 여우가 말했다. "넌 아직까지 나에게는 다른 수많은 꼬마들과 똑같은 꼬마에 불과해. 그러니 나에겐 네게 필요 없지. 물론 너에게도 내가 필요 없겠지. 네 입장에서는 내가 다른 수많은 여우와 똑같은 여우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만일 네가 날 길들이면 우린 서로를 필요로 하게 돼. 나에게는 네가 세상에 하나밖에 없게 될 거구, 너에게는 내가 세상에 하나 밖에 없게 될 거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물론 우정을 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여우의 말은 우정보단 사랑할때 생기는 감정과 더 유사하다. 내 삶 밖에 있거나, 내 곁을 스쳐지나 가면 그만인 수많은 관계가, 또 어떤 존재가 ‘길들임’을 통해 단 하나의 특별한 관계와 존재가 되는 일. 관계 맺기를 통해 세상에 수많은 여자 중, 세상의 수많은 남자 중 당신은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일. 이 신비로운 일은 우정을 통해서 얻을 수는 없다. 우정을 ‘특별함’이나 ‘단 하나 밖에 없는 무엇’으로 환원하면, 우정이 우정으로 지속되기 힘든 속성 때문이다. 우정은 공평하게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무엇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정은 가치 있는 것이지만 사랑을 대신할 수 없다.
"내 생활은 단조로워. (...) 그래서 약간 심심해. 하지만 네가 날 길들이면 내 생활은 환해질 거야. 여느 발자국 소리와는 다르게 들릴 발자국 소리를 알게 될 거야. 다른 발자국 소리는 나를 땅 속으로 들어가게 하지만 네 발자국 소리는 음악 소리처럼 나를 굴 밖으로 불러 낼 거야. 그리고 저걸 봐! 저기 밀밭이 보이지? 난 빵을 먹지 않아. 나에겐 밀이 소용없는 거야. 밀밭을 봐도 난 떠오르는 게 없어. 그게 슬프단 말이야! 하지만 넌 금발이니까 네가 날 길들이면 기막힐 거야. 밀밭도 금빛이니 네 생각을 나게 할 거야. 그렇게 되면 밀밭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좋아하게 될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참을성이 있어야 해, 여우가 대답했다. 다음날 어린 왕자는 다시 그리로 갔다. 언제나 같은 시각에 오는 게 좋을 거야.” 여우가 말했다. “이를테면,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난 점점 행복해지겠지..” “그는 수많은 다른 여우들과 똑같은 여우일 뿐이었어. 하지만 내가 그를 친구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이제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여우야.”
우정에선 가능하지 않은 일을 사랑은 가능하게 한다. 사랑은, 빵을 먹지 않는 여우에게 밀밭을 특별한 의미로 만든다. 밀밭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마저 좋아하게 해준다. 사랑이라는 관계를 맺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를테면, 같은 발자국 소리라도 당신의 발자국 소리는 다른 사람의 발자국 소리와 다르다. 또각또각, 그것은 구두굽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온 몸의 소리다. 그건 그녀의 소리고 그녀의 소리는 곧 그녀의 몸이다. 결국 그 발자국 소리는 그녀의 몸과 같은 것이 된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녀와 그녀의 발자국 소리.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세 시부터 행복한 게 아니라 일주일 전부터 행복한 시간이 주어진다. 어쩌면 한 달, 혹은 일 년 전부터. 사랑은 행복의 시간을(혹은 아픔의 시간을) 신비롭게 확장시킨다. 친한 친구가 아까 내게 던진 한 마디의 말로 잠 못 이루진 않는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 잠시 머물다 떠난 어떤 표정은 나에게 무수한 기호로 다가온다. 친한 친구가 지금 이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밤을 새진 않는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밤을 새는 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사랑은 우정에선 가볼 수 없는, 의미론적으로 훨씬 더 깊고 풍부한 삶의 영역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야.”
우리 삶은 메마르고 메말라간다. 어린 왕자가 다른 별에서 만난 허영꾼처럼 허영과 명예 때문에, 상인처럼 물질 때문에,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가진 것이 많을수록 우리와 우리 별은 점점 메말라간다. 번거롭고 성가신 사랑은 점점 밀려나고 적당히 상처받지 않을 만한 효율적인 ‘관계’들만 유지하며, 사랑이라는 환상을 거부하거나 제거한다. 우리 삶이 사막이고 사막이 돼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일지 몰라도, 사막에서 우물마저 꿈꾸지 않는다는 점은 슬픈 일이다. 어린 왕자의 말처럼, 사막이 사막으로 아름답기 위해서는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있다는 생각 때문인데, 이제 그 환상을 품지 않는다. 삶에서 환상(우물)이 제거되는 일이 효율적인 삶의 방식이 될지는 몰라도, 그것이 삶을 풍부하게 만들진 않는다.
삶은 대개 관계없는 사람들과 무의미한 사건들로 산만하게 구성된 무엇이다. 관계없는 사람들과 무의미한 사건들이, 관계있는 사람들과 의미 있는 사건들이 되는 것은 길들이는 일을 통해 가능한데, 그 길들이는 일은 사랑이라는 환상을 거쳐야 가능하다. 당신이 나만의 특별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도대체 환상 없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그러니, 건조한 삶을, 메마른 사막을 극복하기 위해선 우물이 필요하다. 우물은 어딘가에 숨어 있는 환상이다. 그리고 환상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우리 메마른 삶 어딘가에 숨어있다. 생떽쥐베리에겐 그 환상이 어린 왕자였고, 어린 왕자에겐 여우였다. 하지만, 환상을 소망하기엔 우린, 보아뱀을 보지 못한 그들처럼 너무 현실적인 것일까.
우리는 때로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고민한다. 단조롭게 해석되는 우정으로 만족하며 살 것인지, 아니면 다양한 해석을 자양분으로 삼는 사랑(물론 이 사랑이 짝사랑이든 무엇이든!)이라는 모험에 뛰어들 것인지 말이다.
그때 환상을 품는 어리석은 사람은 비록 그 관계가 우정보다 짧게 끝날지라도, 우정보다 더 큰 상처와 아픔을 줄지라도, 우정보다 더 많은 번거로움과 낭비가 있을지라도 사랑을 선택한다. 왜냐하면, 하나의 해석만 존재하는 단조롭고 메마른 세상에서 살기보단, 어딘가에 숨어 있을 우물을 찾는 삶, 풍부한 해석이 가능한 세상을 사는 게 낫기 때문이다. 내 사랑이 평범하고 흔한 사랑일지라도.
평범한 사랑이라도 위대한 우정보다 낫다. 왜냐하면 사랑은 기호의 측면에서 볼 때 풍부하고, 무언의 해석을 자양분으로 삼아 살아가기 때문이다. -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