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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ssam Sep 17. 2017

[초보 고딩엄마의 분리불안 극뽁일기 12]

저당 잡힌 여름방학

2017년 8월 19일


녀석의 여름방학은 시작부터 요란스러웠다

처음엔 매일 촬영 스케줄이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방학이면 당연히 집에 와있는 날이 더 많겠지 했던 나는 녀석의 방학 스케줄러를 보고 기가 막혔다


서공예는 1년에 두 번 영화제를 개최한다

3월에 한번, 9월에 한번

한 학년에 18명 정도이고

3학년은 입시 준비로 제외되고

방과 후 수업을 신청하지 않은 아이들도 빼고 나면

참여인원은 30명도 채 되지 않는 적은 인원이다


녀석들이 방학 동안 만들어내야 하는 영화는 총 8편!

시나리오가 선정된 녀석들이 각 영화의 감독을 맡는

각자 원하는 영화와 부서를 신청해서 조를 짜는데 인원이 적으니 한 사람이 스태프로 참여해야 하는 영화가 평균 5편 정도 된다



하루는 회의 이틀은 촬영 하루 쉬고 다시 회의와 촬영이 이어지는 강행군이었다

어떤 주는 쉬는 날이 없기도 하고

한 영화를 찍는 동안은 감독 집에서 합숙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여름을 녀석과 함께 보낼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방학 전에 억지로 시간을 만들어 이른 휴가를 다녀왔다

[역마살과 여행 의지 : 뜨거운 여름]


그리고, 여행을 마친 다음날부터 녀석들의 뜨거운 촬영이 시작되었다




휴대폰 연락도 쉽지 않고

촬영감독 집에서 합숙을 할 수도 있다는 말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화를 내는 엄마들도 있었고

아이들 촬영지가 명확히 공지되지 않아 답답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선배들의 힘들 거라는 말을 듣고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1학년 녀석들은 모두 살인적인 더위와

빡빡한 스케줄, 부족한 인원,

열악한 촬영 현장에 조금씩 지쳐갔다


한 번은 인천 부근 갯벌 촬영이 있었는데

경험 부족으로 준비를 미흡하게 했던 1학년들은

팔과 목에 화상을 입고

밤새 끙끙 앓다가 다음날 아침

집으로 보내졌다


엄마들의 단톡방은 아침부터 전쟁이었다

아이들 몇 명이 집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부랴부랴 녀석에게 연락을 했지만

연락이 닿질 않았다


먼저 나온 녀석들의 얘기로는

촬영장에 남았다는 것 같은데

그럼 괜찮은 거 아닐까 안도가 되었다가

또다시 이런저런 걱정이 올라와 불안해졌다


한참을 답답함 속에 기다리는데

녀석이 친구폰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어제 갯벌 촬영 갈 때 탔던 버스에 폰을 두고 내렸다는 것이다

일단 괜찮냐고 물었더니 끼고 있던 토시를 빼고 촬영하는 바람에 팔에 살짝 화상을 입었고

다른 아이들만큼 심하지 않아 남아 있으려 했는데

하필 마법까지 걸려서 힘들어하니 선배들이 보내줬다고 했다


당장 가서 살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일단 좀 쉬었다가 병원에 가보라고 하고 엄마에게 연락을 했다

엄마는 화기 빼고 치료 잘 할 테니 걱정 말라하셨다


분명 밀짚모자와 선크림, 팔토시를 챙기라고 했다는데 녀석들은 그리될 줄 몰랐다고 녀석들다운 대답을 한다


그날 이후,

엄마들 중 시간이 되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챙기기도 하고 이것저것 준비도 좀 더 신경을 썼다

무슨 일이든 겪다 보면 요령이 생기고

스스로 방법들을 찾아가기 마련이지만

딸들을 밖에 내놓은 엄마들의 노파심도 누그러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녀석은 그래도 짬짬이 시간을 내어

궁금해하는 엄마를 위해 사진을 보내주곤 했다


그렇게 한편 두 편 영화가 완성되어 가고

녀석은 제작, 촬영, 조명, 스크립터, 엑스트라 등등 다양한 스태프로 활동하며 하나씩 배워나갔다


여러 학년이 섞여서 작품 활동을 해야 하니

나름 선후배 질서가 엄격한 편이지만

또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우리 아이들이 좋은 모습을 배우고

좋지 않은 모습들은 답습하지 않기를 비란다





하루는 녀석의 촬영장을 찾았다

담당 선생님께 미리 연락을 드리고 간 촬영장은

한 중학교였는데

촬영이 시작되면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모두가 긴장상태로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한 장면을 다양한 각도로 수십 번 촬영을 하는데

에어컨 소리조차 소음이 돼서 끄고 하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선생님께서는 그래도 야외 촬영이 아니어서 그나마 덜 힘든 거라고 하셨다


소품 하나하나까지 꼼꼼하게 챙기고

조명에 배우까지 모든 것이 완벽해졌을 때

독서관을 가득 채운

레디~ 액션!!!

2학년 선배의 촬영 신호는 진지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했다


김밥을 한 줄씩 받아 들고

컷 소리에 한 개씩 입에 넣는 녀석들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들고 간 얼음컵과 아이스티는

촬영이 끝나도록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지만

감히 음료수 먹고 하자는 말조차 건넬 수 없는 분위기였다

장소를 빌린 시간은 정해져 있고

찍어야 되는 씬도 정해져 있는데

이런저런 변수로 수없이 NG가 나고

촬영이 딜레이 되니

아이들 마음이 하나같이 긴장되고 초조하다

그래도 다 같이 마음을 모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을 이 녀석들은 기특하게도 하나하나 차근차근 잘 해나가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 셔터 소리를 낼 수가 없어

결국 가져간 카메라는 가방 안에 고이 모셔두고

아쉽지만 소리가 나지 않는 폰 어플로 멀리서 현장 사진을 몇 장 찍어 엄마들과 공유했다





밥도 잘 못 먹고 잠도 잘 못 자면서

고생스러운 길인데

녀석들은 어찌 이 길을 가려는 걸까

하나하나 조금씩은 다른 꿈들을 꾸고 있는 녀석들의 미래를 잠시 상상해본다

그래도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누군가는 실패하고 좌절하고

또 다른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하는지도 잠시 잊을 만큼

지금 이 순간을 치열하게 열심히 살아보는 건 녀석들에게 값진 경험이 될 것이다


그렇게 녀석의 고등학교 첫여름방학이

무사히 마무리되고

9월에는 땀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8편의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서공예 영화제가 열린다


비록 녀석들은 기획 스태프로

무대 뒤의 오퍼로

행사 진행 스태프로

또 땀을 흘릴 테지만

마지막에 올라가는 스태프들 속에

자랑스레 자신들의 이름을 올리고

엄마들 코끝을 찡하게 할 거라 믿는다


오늘도 나는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낸다


수고했어

참 잘했어



글: koss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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