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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Jan 15. 2018

추운 날 아침

편린 02

"사랑, 그것은 지상의 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빛나며 전혀 다른 향기를 흩뿌리는 하늘의 꽃이었다." 
-『검은 튤립』알렉상드르 뒤마』




아직 한 점 남아있던 어둠이 쏟아지기 시작한 눈으로 씻겨 내려간다. 얼어붙을 것 같은 새벽 공기가 방안으로 들어와 한 바퀴 돌고 창문으로 나간다. 너무 일찍 눈이 떠져서 뒤척이다 결국 조금 더 쓸까 책상 앞에 앉았다. 앞 집에선 이 시간쯤 부부가  출근 준비하는 소리로 요란하다.  

밤 새 많이 추웠다. 꽁꽁 얼어붙은 세상은 발길을 급하게 만든다. 빨리 달리다 넘어질까 걱정될 만큼 사람들이 동동거리며 걷는다. 추위를 피해 들른 카페는 텅텅 비어있다. 창가에는 추운 줄 모르게 햇빛이 들어온다. 창가에 앉아 잠시 쉬어간다. 히터 도는 소리가 카페 실내에 가득 찼다. 예쁜 아르바이트생이 내가 주문한 커피를 가져다준다.
  
"어머, 작가님. 또 오셨네요. 요즘 글 잘 쓰셨어요?"
나를 알아보고 인사해 준다. 그  다정함에 난 그만 얼굴을 붉힌다.
"네, 열심히 쓰고 있어요."
열심히 쓰고 있다는 말은 나에게 해주는 말이다. 너 열심히 쓰고 있는 거야? 게으른 것은 아니지? 그래, 열심히 써야지. 잊지 말아. 같은 말들이  함축되어 있다.
"어제는 왜 안 오셨어요?"
아르바이트생이 또 물어준다. 잊지 않고 물어주는 그 마음이 예쁘다. 햇빛 나는 창가에는  아르바이트생의 마음보다 더 예쁜 커피잔이 있다.  예쁜 커피잔에 내 얼굴이 비친다. 나도 아르바이트생을 향해 웃어준다. 힘들 텐데 예쁘게 일하는 모습이 좋다. 햇빛 가득한 카페에는  오늘의 시간이 가득 차있다.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다. 지금의 내가 있고 지금의 커피가 있다. 나랑 친한 아르바이트생도 함께 있다. 지금이라는 순간에 앉아 문득 나 자신을 들여다본다.

햇빛 속에 뿌옇게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지금 누리는 정겹고 한가함이 가져다주는 여유로움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동안 매일 전쟁 같은 출근을 견뎠다.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밥 먹고 책 좀 보다 7시 20분에 집을 나섰다. 집에서 1시간 20분 걸리는 직장까지 산길 고속도로를 운전했다. 사슴이나 고슴도치, 스컹크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곳이다. 도시 한가운데 있는 병원에는 환자로 가득했다. 환자 보는 일은 좋았지만 그들의 보호자를 만나는 게 힘들었다. 아픈 이들의 괴로움, 아픈 이 가족들의 불안함은 내 심장도 자주 흔들었다. 환자들이 세상을 떠나실 때면 남모르게 엉엉 울었다. 퇴근하고 집에 올 때면 푹 젖은 솜처럼 지쳤다. 텅 비고 추운 집으로 돌아오기 싫었다. 빈손으로 오기 싫어  책 한 권씩 들고 왔다. 집에 돌아오면 죽을 것처럼 힘들었다.

백만 년 만에 처음으로 출근하지 않는 석 달을 보냈다. 쉬는 날이란 이런 거였구나를  새로 깨달았다. 지난날 쉬지 않고 일했던 나를 생각하니 스스로가 대견해졌다. 아침엔  6시에 저절로 눈이 떠지고  아침식사 대신 커피 한 잔과  바나나 한 개로도  충분하다. 책 읽고  뭘 좀 쓰다 운동하러  간다. 자꾸 시계를 보지 않아도 된다. 느긋하게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온다. 오는 길엔 커피도 한잔할 수 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전시회에 가도 된다. 영화 보러 가거나 도서관에 들러도 된다. 자유롭다는 게 이런 거구나, 세상 모든 게 내 것만 같다.

카페에 앉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그들의 말투, 생각, 주제를 듣는다.  내게 없는 것들, 떠올리지 못한 것들을 주워 담는다. 나는 재능이나 재주는 부족하니 노력하는 성실함이 많이 필요하다. 뭔가를 써보려면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려야만 한다. 항상 마음은 바쁘지만 내 발걸음은 느린 듯하다. 양팔 저울을 든 사람처럼 급해지는 마음을 덜어내고 느린 걸음 한 숟가락을 더한다. 그렇게 균형이라는 걸 맞춰가는 게 내 인생이다. 잘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지만 나름 잘 될 때도 있다고 위로한다. 더 잘 될 때가 오겠지, 그날이 오늘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문득 커피에 계핏가루를 넣어 마셔볼까 딴 생각도 해본다. 이런 하루가 행복하다.

솔직히 어떤 날은 우울할 때도 있다. 어제도 잘 쓰지 못했다. 오늘도 손에 잡히지 않는 소설 쓰기가 원인일 때도 있다. 괜히 슬퍼해 하기도 한다. 외로워하기도 한다. 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쓸쓸해할 때도 있다. 밝은 하늘마저 캄캄해 보일 때도 있다. 때론 밥맛도 없다. 티브이도 재미없다. 그럴 때는 이런 생각을 한다.
 "어두운 하늘은 어두운 대로 맛이 있잖아. 비 오는 순간엔 잠시 쉬어가는 맛이 있는 것처럼. 어두워진다는 건 나중에  밝아진다는 말이잖아. 지금은 힘들어도 즐거운 일이 생길 거야. 급할 거 없어. 난 항상 운이 좋았으니까. 천천히 가는 것도 어디야. 적어도  뒤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커피에 계핏가루를 넣으며 생각한다.
 "역시 커피에 계핏가루가 딱이네."  
향기가 좋다. 참 좋다. 기분이 좋아진다. 기분 좋게, 그렇게 잠들 수 있는 하루가 좋다.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 춥다. 찬 바람이 매섭다. 그렇지만 맑은 날이다. 햇빛도 있다. 햇살 따사로운 한가한 카페에서 커피 한 잔으로 시작되는 하루. 오늘은 계핏가루를 좀 많이 넣어본다. 시럽은 사양이다. 계피 향이 가득한 하루를 또 만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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