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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Aug 11. 2019

그때의 기억

아홉 번째 이야기


워터 파크에 가기로 했을 때 친구가 말했다.

"거기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슬라이드를 타는거야.  기다리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르겠지만. "

"나는 무서운 거 못 타는데... 같이 타겠다면 나도 탈게."

"걱정 마.  같이 타자."

그 말 한마디만 믿고  줄을 섰다.  길고 긴 줄이 계단까지 이어졌다.   우리는 어제 읽은 책과  새로 개봉할 영화에 대해 한참 수다를 떨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상상도 못 한 채로.


계단을 몇 개나 올랐는지 모른다.  고소공포증이 엄습할 만한 위치에 줄이 멈춘다.   생각보다 너무 높아 덜컥 겁이 난다.  게다가  슬라이드가 너무 좁아 한 사람만,  그것도 누워서 밖에 탈 수 없다는 게  안전요원의 설명이다.  그동안은 친구와 함께 탈거라 안심했는데  혼자 타야 한다는 부담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내 뒤에 서있는 줄이 너무 길어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안전요원의 설명에 따라 입고 있던 구명조끼와 아쿠아 슈즈를 벗고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함께 탈 친구 대신으로.


긴장은 되었지만 줄 선 사람이 꼬맹이들이라  용기를 얻었다.  안전요원의 신호에 따라 슬라이드에  올랐다.  누워서  물 흐르듯 쓸려갔다.  구불구불,  밑으로  중력을 거슬렀다가  잡히듯 끌려갔다.

짧은 순간이지만  슬라이드가  '인생의 축소판'같은 생각이 들었다.  무섭지만 혼자 타야 한다는 것,  중력처럼 운명이 당기는 대로 미친 듯 달려가야 한다는 것도.   막 밑으로 떨어질 때는  스릴도 있었고  구불거리는 곳을 달릴 때는  짜릿하다.   누워 즐기는 동안 슬라이드는 정말 짧게 끝났다.  

풍덩

꼬르륵...

물에 푹 잠겼다.  허우적댄다.  물을 잔뜩 먹고 말았다.  숨을 못 쉰다.  공포스럽다.  안고 있던 구명조끼와 아쿠아 슈즈, 쓰고 있던 캡 모자까지 근처  물 위를 둥둥 떠다닌다.

어디선가 안전 요원이 나타나 나를 끌어내 준다.

"신발! 신발요!"

나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안전요원이 신발과 모자를 나와 함께 건져 물가로 데려다준다.

'삶이 끝나는 곳,  죽음이 이런 걸까?'

혼자 타야 했던 슬라이드가 끝나던 곳에 깊은 물속에 빠지듯  풍덩 소리를 내던 그 순간.   정신없고 짧던 인생이 끝나는 순간.  슬라이드와  전혀 다른 세상을 향해  나가는 순간과  비슷하지 않을까?


"어때,  무서웠어?"

친구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친구의 권유로  방금 탄 것보다 더 무섭다는 슬라이드를 타러 갔다.  아까 것과 달리 줄 선 사람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금세   슬라이드에 올랐다.  타자 마자 '어! ' 하고  당황한다.  아까보다는 훨씬 길고  구불거리고,  가파르군... 하는데  갑자기 거대한 팽이 같은 곳으로  빠져나왔다.  두 번쯤  팽이 주위를 뱅뱅 돌고  가운데 난  통로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푸우덩'

이번 물은 아까와 달랐다.  매우 깊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다.  꼬르륵 소리도 없이 가라앉았다.  허우적대도  떠오르지 않는다.  눈 앞에  내 구명조끼와  아쿠아 슈즈가  둥둥 떠다닌다.  물 밖으로 나를 밀어내 준 것은  역시 안전 요원이었다.   몸은 떠올랐지만  물 많이 먹은 게 틀림없다.   겨우 물가에 올라가 주저앉았다.  다리가 풀려서 한동안 앉아서 쉬어야 했다.

'콜록콜록'

기침이 잦아들지 않는다.

 이곳에서 제일 무서운 슬라이드를 탔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 워터파크에서 제일 무서운 것을 몰랐고  끝 부분 풀이 그렇게 깊을 줄 몰랐으니 겁 없이 탔었다.  그리고  겁 없이 탄 것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대신 뭔가를 성취했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내 바로 다음 순서로 탄 친구도  곧 등장했다.  내가 피신한 물가에 올라앉아서  "어때, 탈만 했지?"  하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더니  친구의 눈이  빛났다.

"그럼  방금 탄 것보다는 덜 무서운 걸 타러 가자.  이 워터파크에 있는 슬라이드 세 개 정복해야지."

세 번째로 탄 것은 처음 것보다는 길고  두 번째 것보다는 덜 가팔랐다.   그전에 두 개를 탄 후라서 인지  이번에는  편히 누워  미끄러지는 기분에 더해  가끔 얼굴을 때리는 물줄기와  풍경까지 즐길 수 있었다.


인생도  이렇게  여러 번  자꾸  연습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처음에는 모든 자극이  놀랍고  공포스러워도  나중에는  스릴과  짜릿함을 즐길 수 있을 텐데.  좀 더 많은 것을 즐기고  느껴볼 수 있을 텐데.


슬라이드를 다 타고나서 우리는 풀장과 스파를  내내 돌아다녔다.  몇 시간 동안 힘든 줄 모르고 놀았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아주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워터파크에서 처럼 즐기는 동안에는 힘든 줄도 모른다.  나도 그렇게 살아볼까나.  쓰고 싶은 글을 쓰며,  좋아하는 글을 읽으며,  즐기는 동안에는 힘든 줄도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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