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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Sep 02. 2022

24. 일기떨기

빵은 그 존재만으로도 정말이지 미덥고 귀엽다



 주말 제빵 수업을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집 근처에 있는 ‘해피 아카데미’에 수강 등록을 했다. 내일배움카드를 활용한 국비 지원 프로그램이라 개인 부담금은 약 30만 원. 앞으로 매주 토요일, 9시 30분부터 3시 30분까지 하루 6시간, 총 15번의 수업을 들을 예정이다. 빵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처음 제빵을 배운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사회초년생인 나에게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결과물이 필요했다. 책 만드는 일에는 도무지 요령이 통하지 않고, 내가 구사하는 단어와 문장마저 의심이 들자 일과 일상에서의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다. 최근 제빵을 다시 시작하면서 알게 된 게 하나 있다. 책을 만드는 일과 빵을 만드는 일이 다르지 않다는 것. 책과 빵은 아주 작은 실수도 반드시 흔적을 남기기에 이 일에는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는 것.


 맨 처음 비상식빵의 결과물을 확인했을 때가 생각난다. 선생님이 한 손에 투박한 사각형의 빵을 들고 사이사이 보이는 실수들과 그 원인에 대해 짚어나갔다. 가장 먼저 재료 개량의 문제부터 1차 발효 시간, 성형할 때의 자잘한 실수들까지. 빵을 만들 때의 과정에 따라 결과물 역시 상이했다. 막연히 나의 작은 실수쯤이야 밀가루 반죽 사이에 뒤덮여 그 자취를 감출 거라 여겼다. 하지만 나의 모든 공정 작업은 노르스름하게 구워진 빵 표면 위에 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책 만드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원고 작업 내내 눈에 띄지 않았던 오탈자나 실수들을 꼭 책이 출간되자마자 알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이때 사소한 실수일수록 더 빨리 드러나고, 그럴 때면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수습할 수도 없는데, 초판을 다 소화해야 만이 중쇄의 기회가 올 텐데 하면서 한숨을 쉬곤 했다. 그렇게 첫 회사에서의 2년 동안 내가 만든 책을 단 한 권도 집에 가져가지 않았다.


 최근 제빵을 다시 시작한 이후로 일상에서도 종종 실습실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들리곤 했다. 반죽에 너무 많이 손을 대면 안 돼요, 라는 말. 밀가루 반죽을 여러 번 치댈수록 표면이 거칠어지고 흠집이 나는 것처럼 타인의 글 역시 내 마음대로 고칠수록 어색해지곤 했다. 어떤 표현이 낯설게 느껴질 때면 작가의 맨 처음 문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결국 문제의 원인은 내가 지나온 길 위에 남아 있기 마련이었다. 가끔은 처음으로 돌아갈 엄두조차 나지 않을 때가 많지만 언제까지고 지금의 상황에 멈춰 있을 수만도 없었다. 저자와 맨 처음 주고받은 메일을 확인하고 초교지를 들여다보는 것. 그마저 가까운 과거처럼 느껴질 때면 어떤 한 문장 위에 누구보다 오래 서 있었을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왜 이 단어를 찾아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이 자리에 써넣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다시 연필을 깎고 진짜 궁금했던 것에 대해 묻게 된다. 전체 원고의 결이나 앞뒤 문장의 맥락보다 더 중요한 이 글을 쓴 사람의 마음을.


 평일에 종일 일하고 주말까지 일을 벌이고야 마는 나에게 종종 빵 만드는 일의 즐거움에 관해 묻는 이들이 있다. 이전에는 이 일에 대해 말을 덧붙이는 게 사족처럼 느껴지고 또 하나의 변명을 만드는 일 같았다면, 이제는 보다 분명하게 방점을 찍고 싶다. 빵은 그 존재만으로도 정말이지 미덥고 귀엽다. 급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믹싱을 마친 반죽은 짧게는 30분 길게는 1시간 가까이 1차 발효를 거쳐야만 한다. 이때 동그란 반죽은 발효기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신의 몸을 있는 힘껏 부풀려야 한다. 알맞게 익기 위해서 충분히 기다리고 그 어떤 뜨거움도 견뎌낸다는 것이 대견할 때가 많다. 이럴 때면 내가 빵을 만드는 게 아닌 빵이 스스로 완성되어가는 걸 단지 지켜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내게 자신의 글을 처음 보여준 이의 마음도 같지 않을까. 그럼 나는 그 마음이 다치거나 날아가지 않도록 책 안에 가지런히 모아야겠지. 그가 견딘 뜨거운 순간들을 절대 잊지 말아야지. 이렇게 글을 배우고, 빵을 배우며 살다 보면 나도 조금쯤 미더운 사람이 되지 않을까.




화 주제

Q. 요즘 주말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자신만의 주말을 보내는 루틴이 궁금해요.

Q. 최근에 가장 뜨거웠던 순간은 언제였나요올해 상반기를 통틀어 잊고 싶지 않은 순간

Q. 어떤 존재나 사람에게 미더운 마음을 느끼는 편인가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3. 소진

낮에는 책을 만들고, 밤에는 글을 씁니다.

그 사이에는 주짓수를 하고요.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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