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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HD 엄마입니다. 아, 제 애가 아니고요, 제가요.

만 30세 ADHD라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다.

by 미소핀


'ADHD'라는 거 들어본 적 계세요?

"설거지하고 있을 때 아이들이 말을 걸면, 과부하가 걸려요. 아이의 말을 못 들은 것은 아닌데 그 청각적인 정보를 이해하고 소화해서 내보내는 것이 엄청 힘들다? 짜증도 나고요."


"혹시 어릴 때 산만하다거나... 'ADHD*'라는 거 들어본 적 계세요?"

* ADHD(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


"초등학교 저학년 때 생활기록부에 산만하다는 글을 본 적 있어요. 음, 정리정돈이 잘 안 된다거나 물건을 잘 잃어버린다거나 그런 건 있죠.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요?"


"이전에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못 듣는 일도 종종 있다고 하셨죠. 주의집중력과 관련된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인터넷에 검색하셔서 한번 ADHD 검사항목 살펴보시고, 필요하면 병원에 가서 검사받고 약 먹는 방법도 있어요."


"그렇군요."






나는 ADHD인가 아닌가

심리상담 중 갑작스레 권유받은 ADHD 검사. 남편은 심리상담소에서 검사받게 하려는 수작이 아니냐 의심했다. 그러나 내가 가는 상담소에서는 ADHD 검사를 하지 않아 검사를 하는 정신과를 따로 찾아야 했다. 이어 남편은 나의 평소 행동을 돌이켜보며 좋은 놀림거리를 찾은 표정이었다.


요즘 나의 상황을 알아챈 것일까. 유튜브 알고리즘은 빠르게 ADHD 정보를 나에게 제공했다.


ADHD 걸음, 손 모양이라니 도대체 뭐지? 와, 완전 나잖아! 청소하는 도중에 물건 가져다 놓다가 잊고 또 다른 일 하고... 이거 완전 나네! 시간을 잘 못 지켜?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멀티태스킹을 이렇게나 한다고? 난 아닌데?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잊고 잠시 찾아 헤매긴 하지만 늘 잃어버리진 않아. 와, MBTI ENTP이 ADHD 특성이 있다고? 재밌는 생각인데? 여기서 나도 ENTP인 게 킬링포인트다 진짜.


이런저런 증상들을 보며 재미있는 콘텐츠를 발견한 듯 하루종일 ADHD 관련 쇼츠와 영상을 보고 글을 읽었다. 당시 내가 내린 결론은, '나는 ADHD 성향이 있긴 한 것 같지만, 심각하지 않아. 약 안 먹어도 돼.'






답답해서 검사하러 간다!

동생이 우리 집으로 놀러 왔다. "아니 글쎄 ADHD 검사를 해보라고 하시는 거야~" "하하 언니는 왠지 ADHD 맞을 것 같다." 소소한 근황 공유와 함께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동생은 아이들을 봐주고 나는 밀린 집안일을 하는 참이었다.


밥을 하기 전에 우선 싱크대를 정리해 볼까? 아침 설거지가 그대로 있네. 먼저 식기건조대에 있는 것부터 정리를 하고, 애벌 설거지해서 식기세척기에 넣어야지. 식기세척기에 그릇 넣는데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아직 축농증이 덜 나았나? 감기약 어디에 뒀지? 감기약 먹고 마저 해야지. 약 설명서를 읽어보니 마약성 성분도 있잖아? 이렇게까진 필요 없는 것 같은데... 앗, 습도계를 보니 지금 습도가 너무 낮잖아? 가습기에 얼른 물 채워야지. 가습기를 허겁지겁 들고 싱크대로 오니 설거지거리는 아직도 싱크대에 가득이네. 식기세척기에 다 안 넣었구나!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지? 아 참 약! 약도 안 먹었고, 가습기에 물도 바로 못 넣겠고... 하, 스트레스!


혹시 이거 ADHD 증상인가? 심각한 건가? 아 고민하는 것도 이제 지겹고 답답해. 검사받아봐야겠다. 제일 빠른 날짜가 24일? 오케이 예약 완료. 응? 뭐라고? 아, 방금 병원 예약 좀 했어.






크리스마스이브 그리고 ADHD 검사

남편에게 크리스마스 케이크 예약을 부탁받은 나.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예약 할인 이벤트 기간은 놓치고 12월 23일 저녁 방문하여 예약을 하였다. 아이들과의 빵집 산책을 즐기며, 아이들에게 내일도 같이 케이크 가지러 오자며 집으로 돌아왔다.


크리스마스이브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ADHD 검사를 받는 날! 별표 백만 개~ 차 타고 30분은 걸리는 곳이니 미리미리 출발해야지. 이런저런 검사지 작성을 해야 할 수도 있으니 일찍 도착하는 게 좋겠지? 예약시간 1시간 전이군! 좋아. 자동차 키 챙겼고, 대기시간에 읽을 책도 챙겼고, 그리고 내 카드가? 카드가 어디 갔지? 언제 마지막으로 봤지? 음... 음, 어제 빵집에서 결제한 게 마지막이네? 빵집 지금 문 열었나? 전화해 봐야지. 아 네, 사장님! 거기 있다고요? 지금 바로 가지러 갈게요. 감사합니다! 다행이다. 빵집 들러서 바로 병원으로 가야겠네. 시간 충분하겠지? 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도 선생님께 말씀드려 봐야겠다.


다행히 예약 시간보다 20분은 더 빨리 도착해서 여유 있게 검사지를 모두 작성하고, 예약시간에 맞춰 상담을 진행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ADHD 증상은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등 다른 이유들로 생길 수도 있기에 짧더라도 상담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상담은 30분이었고 나름 정돈되게 나의 상태를 말씀드릴 수 있었다.


"지금 미소핀님이 말씀하신 것들이 모두 거짓이 아니라면, 검사 없이도 바로 약을 드릴 수 있어요."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그 정도로 심각하다고? 이 의사 선생님 약 팔려고 그러시는 거 아니야?

"아뇨, 검사받아 볼게요."


음, 두뇌트레이닝 게임 같군. 이걸로 테스트한다고? 너무 쉬워서 이러다 약 못 받을 것 같은데? 여기 검사실 벽지 색깔이랑 무늬가... 앗! 놓쳤다. 아, 또 놓쳤어. 한 3개 정도 놓쳤나? 그래그래 이 정도면 선방했지. 어? 이건 조금 어려운데? 아아, 알겠다. 쉽네!


"생각보다 심각하네요."

"네? 검사 잘 본 것 같았는데요?"

"이러이러한 부분에서는 하위 5%이고, 저러저러한 부분은 또 뛰어난 부분도 있어요. 그래도 상담하며 생각했던 예상보다는 더 안 좋네요. 약 처방해 드릴게요."






ADHD라는 빨간약

어떤 사람들은 내 인생이 이렇게 고달픈 이유가 ADHD라는 것을 알고 나면 차라리 후련하고 좋다고 하던데, 왜 나는 기분이 안 좋지.


"그래도 ADHD는 장애가 아니에요. 현대에나 그렇지 과거에는 필요한 재능들이었어요. 전쟁을 하면 행동대장도 필요하고, 더 부산스럽게 탐색할 수 있는 사람도 필요했을 거고요."

의사 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해주신 말들이 떠오른다. 위로해 주신 거겠지?


그저 조금 주의산만한, 엉뚱한 사람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는데, 괜히 검사를 했나 후회가 들기도 했다. 과거 억울했던 순간들, 혼란했던 순간들, 그리고 외로웠던 순간들이 다 ADHD 때문이었던 걸까?


그다음엔 약을 먹고 변하는 '나'가 과연 똑같은 '나'인지도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의 '나'로는 온전하지 않은 걸까? 유전적인 이유도 있다고 하는데 그럼 우리 아이들도? 뭐부터 해야 하는 거지?


괜히 알게 된 걸까?





앗, 벌써 애들 올 시간 다 됐네. 애들이랑 케이크 가지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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