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을 먹고 나서야 알게 된 진짜 ADHD의 삶
최근 SNS로 관심이 늘며 ADHD 환자가 급속하게 늘고 있는 추세다. 나도 ADHD 증상을 여러 미디어를 통해 접할 수 있었지만 댓글에 달린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와 나도 그런데! 나도 ADHD인가 봄."을 보며 '다들 그러고 사나 보다~' 생각했다.
부주의, 건망증이나 무기력증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애매한, 순간적인 실수 또는 게으름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날의 컨디션이나 음식, 수면 등 수많은 상황의 조합일 것이다. 다만 ADHD 환자는 그것이 일상이고, 그 일상에서 불편함을 초래한다.
- 하나에 꽂히면 주야장천 즐기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관심이 식음
-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까먹거나 미룸
- 충동적으로 결정하고 진행하는 경우가 있음
- 똑같은 업무 똑같이 반복하는 거 절대 싫음
- 어릴 적 산만하다는 생활기록부 기록
- 사람 이름이나 얼굴을 잘 못 외움
- 한 가지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다른 일로 넘어갈 때가 종종 있음(그리고 원래 하던 일을 잊음)
농담 아니고 댓글에서 다들 그러고 산다길래 진짜 다 그런 줄 알았다. ADHD 확진 후 처음에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ADHD 알고리즘을 공유한 사람들이니 진짜 ADHD 환자들만 댓글을 남긴 것일지도 모르겠다.
약을 처음 먹고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감정 조절'이었다.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고 싶지 않고, 지르면 안 된다고 수많은 책에서 배웠는데! '미소핀아 제발 참아! 참을 수 있어! 한 번만 더 참자.' 하는 마음의 목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첫째야!!!! 둘째야!!!!"하고 수도 없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약 먹고 첫 일주일, 감정 조절이 편했다. 그게 벅차서 눈물이 났다.
'남들은 이렇게 쉽게 감정을 참고 육아를 하겠구나.'
나 스스로 ADHD라고 인식하지도 못했지만, 감정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에게 소리치는 것이 단지 감정 조절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참아'라는 마음속 한 마디가 울리기도 전에 전에 없이 차분하게 아이들을 대할 수 있었다.
첫째가 애착 형성이 완성된다는 3살 이전에 ADHD인 걸 알고 약을 먹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둘째에게 하루라도 더 일찍 소리 지르지 않고 잘 대해줬음 더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들었고, 곧 그 아쉬움은 육아에서 나의 대인관계로 점점 확장되어 과거들을 끄집어냈다. 나는 한동안 내가 저질러 왔던 비참한 과거의 일부가 ADHD의 증상이 아니었을까 치환하기도 했다. 내가 ADHD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왜냐하면 과거의 나는 ADHD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였으니까 그랬다. 그런데 ADHD라는 병이라는 것을 온전히 인정하려면 과거의 사건 하나하나를 다시 해석해야 했다. 요즘은 더 이상 해석을 적극적으로 하지는 않지만, 해석의 갈피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아무튼 그랬다. 힘든 게 힘든 줄도 몰랐다. 다들 그렇게 사는 줄만 알았다. 육아는 어려운 일이고, 대인관계도 어려운 일이니까. 그런데 정말 나한테는 더 어려운 일이 맞았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첫째가 평생 기억을 할 수 있는 지금이라도 내가 약을 먹고 좀 더 차분하게 대할 수 있어 다행이다.
에너지 넘치는 둘째가 ADHD가 인지 아닌지 내가 알아챌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한창 요리삼매경에 빠져있던 나를 보던 동생이 나에게 말한다.
"언니야 약 안 먹었나? 언니는 (요리하던 음식) 떨어뜨린 거 줍는 시간이 반, 요리하는 시간이 반이고?"
킁 당근채 볶다 보면 웍 밖으로 좀 나갈 수도 있지!
조리던 우엉도, 볶던 어묵도, 삶던 콩나물도, 무치던 시금치도 어김없이 발 옆으로 우수수 떨어진다.
허리 굽혀 떨어진 음식을 줍고 일어설 때마다 마주치는 동생의 한심하다는 눈빛.
나 혼자일 땐 평범한 요리시간이었는데, 동생의 지적으로 어째 힘겨운 요리시간이 되었다.
"오늘 오후 약을 안 먹어서 그런가... 허허"
어릴 적 동생은 천방지축 우당탕탕하는 나를 보고 "오늘 약 안 먹었나?" 하는 농담을 했었는데 이젠 그것이 사실이 되었다. 약을 안 먹으면 안 먹은 티가 난다. 깜빡깜빡 잊는 것도 늘고 부주의하게 어디 부딪치거나 다치기 일쑤다. 이러다가 약에 중독되면 어쩌냐고? 약 먹는 것도 깜빡한다!
ADHD를 확진받던 날, 의사 선생님께서는 가족력을 언급하시며 부모님의 성향, 기질이나 정신병 이력 등을 물어보셨다. 엄마 쪽 유전을 추측하긴 했지만 엄마를 전형적인 ADHD 환자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머리에 번쩍 든 생각 "선생님, 저 아이가 있는데... 아이들은 음, 언제부터 ADHD인 걸 알 수 있고 약을 먹이나요?"
이제 나의 유전자는 나를 떠나 아이들에게로 흘러갔다. 유전자가 ADHD 발병의 모든 것을 좌우하지는 않지만, 총으로 치면 트리거를 쥐어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ADHD 확진 이후 관련 공부도 열심히 하고, 아이들에게 이 병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그 과정에서 어린이집을 옮기기도 했다.) 다음 연재글에서 언급하겠지만 건강한 식습관과 생활습관 등으로 후천적인 발병 요인을 제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아이들은 엄마를 보고 닮는다. 요리하다가 음식을 흘리는 모습도 배울 것이다. 정리정돈을 어려워하고, 끈기 있게 놀이나 집안일에 집중하여 마무리를 하기 어려워하는 것도 보고 배울 것이다. 분명 ADHD가 아닌 아이가 보고 배우기에도 썩 좋은 생활습관이 아니다.
"엄마, 옷을 여기 걸어두면 안 되잖아."
"엄마! 나는 이 게임 더 하고 싶은데..."
"엄마 손에 이거는 왜 또 다쳤어?"
"엄마 또 차키 안 들고 왔어?"
아이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까 때로는 무섭다. 아직 ADHD라는 병을 모르는 아이들이라 나의 행동과 태도를 마냥 쉽게 이해해 줄 순 없을 것이다. ADHD라는 병을 알아도 손가락질받을 수 있는 분위기이기에 아이들 주변의 사람들이 나에 대해 나쁘거나 불쌍하다고 하면 어쩌지, 또 언젠가는 아이들도 나를 약 없이는 뭔가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나에게 ADHD를 물려받지는 않을까 그리고 나를 원망하지는 않을까. 약 복용을 언젠가 그만하더라도 나는 이런저런 불안감을 안고 육아를 이어갈 것이다.
주로 ADHD 약을 먹는 사람들은 높은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직장인, 사업가, 학생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육아를 하고 집안일을 하는 주부가 굳이 ADHD약을 먹어야 할까 싶겠지만, 더 많은 ADHD 환자를 늘리지 않기 위해서도 나에게는 ADHD 약 복용이 필요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병을 물려줄 수는 없잖은가.
당장 내가 생각하는 최선을 위해 약을 복용하고 있다. 나를 오롯이 사랑해 주는 아이들이기에 감사함과 미안함을 담아 정성껏 사랑으로 돌봐주고 싶다. 언젠가 나의 병을 아이들에게 밝히고 진심으로 웃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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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일, 그림 그리는 일이 즐거운 자기계발 중독 엄마작가
성인 ADHD여도 육아와 자기계발은 계속된다
작품 제안은 jennifer7113@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