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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신 Nov 01. 2019

단풍

눈이 부셨다. 단풍이 서린 산자락 나무들 꼭대기 위로 내리쳐 오는 가을 햇빛 때문이었다. 하루 여정에 상서로움을 알려준 고마운 햇빛이었다. 단풍은 저 햇빛의 산물이기도 하다.    


과학적으로 살피면, 봄과 여름에 나뭇잎의 엽록체 속 엽록소가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일으키는데 이 엽록소 덕분에 잎이 녹색을 띠게 된다. 가을엔 이 엽록소가 줄어들고 대신 다른 색소들이 나타나 단풍 색을 띠게 된다. 특히 안토시아닌이라는 색소 덕분에 붉은색 단풍이 드는데 이 색소도 햇빛이 만든다.     


과학적으로는 그렇지만 나는 단풍을 햇빛이 봄여름을 통해 잎을 달궈 가을에 대장간 쇳덩이처럼 붉게 만든 거라고 표현하고 싶다. 잎을 그렇게 만든 햇빛이 가을 소풍을 나온 우리도 달굴 기세다. 공초 오상순 시인의 묘소가 북한산 빨래골에 있다. 내가 속한 기행반에서 하루 문학기행으로 오상순 시인을 선택했고 제일 먼저 묘소 참배를 하러 이곳 단풍 물든 곳에 모였다.     


쌀쌀함을 염려했던 우리의 머리를 햇빛이 달구더니 음복으로 건네진 막걸리와 점심때 먹은 소주가 내 내장을 달궈 내 몸도 단풍이 되었다. 그런 상태로 산야와 도심을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    


문학기행은 마치 가톨릭에서 명절이 겹쳐 금육이 해제된 날과 같은 자유로움을 허락한다. 기행(紀行)은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기행(奇行)도 허용하는 1년 중 축제날과 같다. 감히 비할 바 못되지만 공초 선생 따라 우리도 구름처럼 자유롭게 노니며 하루를 노닥거렸다. 공초 선생은 평생 가족도 집도 없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사셨다.     


뜻밖의 선물, 단체 녹색 스카프가 바로 이날 하루를 산속에서 자맥질하게 해주는 통행증이 돼주었다. 공초 선생 묘소에서 예를 갖춘 것도, 시를 낭송하고 느낌을 나눈 것도, 도시락이 아니라 찰밥 집밥으로 점심을 한 것도, 남의 배드민턴장에서 마음껏 남의 훌라후프를 돌리고 가위바위보 놀이를 한 것도 이 통행증 덕분인 거라 여기고 싶다. 거의 멋을 내는 일이 없는 나도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우쭐해했다. 그런데 이 통행증이 여기서만 통하는 것이었던지 기행 다음 날 이 스카프를 하고 친구를 만났는데 나보고 웬만하면 푸는 게 좋겠다 했다……       

 

‘폐허’ 동인지를 만든 오상순 시인의 시가 일제 치하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퇴폐주의와 허무주의에 머물고 말았다고 한 선배가 말했다. 시인의 줄기찬 담배가 그걸 상징하지 않을까. 선배가 어렵게 모신 공초숭모회장 이근배 시인의 강의가 각별했다. 오상순 시인이 줄곧 머문 명동 청동다방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하셨다는 내용, 구상 시인의 시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꽃자리니라”(‘꽃자리’)가 스승 오상순 시인에게서 기인했다는 사실이 그렇다. 그렇게 시인이 문단의 보이지 않는 거목임을 이번에 알았다.    


4일 연속 밤새 일하고 바로 기행에 참석했다. 몸은 힘들어도 온화한 분위기 덕분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사진을 찍는 대신 많은 대화를 나누고 술과 안주를 즐기고 햇빛과 울긋불긋 산야에 취했다.


오상순 시인의 시 ‘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을 접한 것을 기회로 ‘밤’에 대해 생각한 다음 하나의 글로 마련해 볼 생각이다. 기행 때는 낮을 실컷 즐겼는데 밤은 생각지도 못한 또 다른 멋을 지니고 있을 거라 기대한다. 다음 브런치 글로 소개하겠다. 11월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소소한 일상에서 그날의 즐거움을 찾으며 나름의 가을날의 동화를 만들어 나갔으면 하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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