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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영 Apr 26. 2020

나의 첫 신경정신과 방문기

처음 공황발작이 있고 2년이 지났다.

기숙사를 나와 자취를 시작했고, 3학년이 되었다. 선배들이 우스갯소리로 우리 과 3학년은 사망년이라고, 3학년 때 가장 힘들다고 겁을 줬었는데. 패기롭게 6 전공을 신청했다. 2학년 성적 평점이 잘 나왔던 것이 자신감을 심어줬던 것 같다.


국가근로장학생으로 매주 3번 학교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청소년보호센터에 출근했다. 매주 수요일엔 학생회 회의. 나머지 시간에는 과제와 공부를 했다. 주말에는 당시 사귀던 남자 친구의 군 면회.

지금 돌이켜 보면 저 스케줄로 몸이 무너지지 않는 게 신기한데.. 그때의 나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환상에 빠져있었다.




공황과 우울의 시작은 전 남자 친구와의 이별이었다.

그가 상병쯤 되어서였나. 갑자기 이별을 통보했다. 놀란 나는 깨진 관계를 어떻게든 붙여보고자 노력했고, 요즘 유행하는 말로 가스라이팅이 시작됐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나는, 어느새 그 남자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사람이 되어있었다. 자존감은 바닥을 찍었고 의욕이 없어졌다.

집에 오면 바로 잠들어서,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떠있을 때 일어나곤 했다. 왜 그런지 몰랐지만, 돌아보면 우울의 시작이었다.


다시 찾아온 공황발작의 트리거는 할아버지의 죽음이었다. 내 기억 속 할아버지는 늘 당뇨 때문에 관리를 하고 계셨는데, 결국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그리 살가운 손녀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척을 지고 사는 나쁜 손녀도 아니었다. 한두 달에 한 번쯤 본가인 대구에 내려가면 인사드리러 가고, 명절에 뵙는. 그런 평범한 관계였다.

17년 2월, 학기를 시작하며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우리 소영이 이번에 보고 못 볼 텐데... 아이고..' 하고 우셨다. 그때는 정말로 병원에서도 퇴원해도 괜찮다고 할 만큼 상태가 좋아지셨던 터라.


할부지 와 우노. 나 여름방학 때 보면 되지 또 올게!

하는 철없는 인사를 뱉고는 집을 나섰다. 그게 마지막 인사일 줄도 모르고




그 해에는 5월 초에 연휴가 참 길었다.

한 번쯤 집에 내려갈 법도 한데 우울증이 참 무서운 게 연휴 내내 집 밖을 한 번도 안 나갔다. 내심 섭섭해하는 엄마에게는 과제가 너무 많노라고 거짓말을 했다.

긴 연휴가 끝나고 다시 주말이 왔다. 토요일 늦은 밤 엄마의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께서 많이 안 좋아지셨다고.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까 내려오라고.

그때가 밤 11시쯤 되었을 때였나. 택시를 타고 서울역이든 고속터미널이든 갔다면 대구를 갈 수 있었지만. 너무 늦어서 차가 없을 것 같다고 내일 첫차를 타고 가겠다고 답했다.

그 선택이 내 평생에 걸쳐 후회할 일이 될지는 몰랐지.


유난히도 아침에 눈이 잘 떠졌던 새벽이었다. 잠들기 전에 예매해둔 기차표를 확인하며 서울역으로 향했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아마 돌아가실 것 같다며 연락을 한번 더 남겼다. KTX 첫차는 왜 이리 늦게 출발하는지, 300 km/h라더니 왜 이렇게 느린지. 어제 고속터미널에서 고속버스 막차라도 탈걸. 멍청아. 왜 그랬어. 왜 그랬어..


할아버지께서 입원한 병원은 동대구역에서 택시로 5분 남짓한 거리.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잡아타면 마지막 가시는 길 인사는 할 수 있겠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초조하게 창밖을 보는데,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께서 방금 돌아가셨다고. 병원으로 오면 엄마한테 전화하라고.

안되는데.. 아버지랑 여름방학에 다시 보기로 약속했는데.. 20분만 더 기다리면 볼 수 있었는데. 곧 동대구역인데..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고 서울로 돌아왔다.

집에 혼자 있는 날이면 죄책감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때 안 그랬더라면. 이렇게 했다면. 집에 좀 자주 갈걸. 이미 지난 일들에 만약에를 붙이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이 없지만. 그때 나는 과거의 나를 탓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이 많아졌고. 한 전공수업의 교수님은 연락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 만나는 게 싫고 내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가 날 비난할 것 같아서. 지하철을 탈 수가 없었다. 사람 많은 곳에 가면 숨을 쉴 수가 없어서 토할 것  나날이 이어졌다.


강의실에 앉아있는 것도 힘든 날이 이어졌고, 아. 병원을 가야겠다. 하는 결론에 다 닿았다.

학교 근처의 오래된 건물에 있던 한 신경정신과로 찾아갔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서 놀랐다. 중년의 아줌마, 아저씨,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사람들, 나이 드신 할머니, 10대 자녀의 약을 타러 온 부모님도 계셨다. 세상에 힘든 사람들이 많구나.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신경정신과에 오기를 꺼렸던 내가 부끄러웠다.

진료를 받고 나면 감기 낫듯이 나도 뚝딱하고 낫는 건가? 3개월, 6개월 약을 먹어야 한다던데. 30분쯤 기다렸을까.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고,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처음 보는 신경정신과 진료실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세면대가 있었고 의사 선생님 책상에는 티슈가 놓여있었다.

어디가 힘들어서 왔냐는 물음에 어떤 일부터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 대답보다 눈물이 먼저 나왔다. 선생님은 익숙한 듯 티슈 한 장을 건넸고, 나는 한 장으로 모자라 두세 장을 더 쓰고서야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못나서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것 같다는 말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도 고인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하지만 살면서 주변을 돌아보면 마지막 순간을 곁에서 지켜보는 경우가 더 적어요. 그건 환자분이 잘못한 것도 아니고 못난 것도 아니에요.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손녀가 본인 생각에 힘들어하는 걸 바라지는 않을 거예요.

하셨다.


길지 않은 상담이었지만, 많은 위로를 받은 날이었다.

진료를 마무리하면서 우울감과 공황발작이 있으니 약을 먹어보고 혹시라도 부작용이 있으면 바로 방문하라고. 약을 조절해야 하니 당분간은 매주 내원하라는 말을 덧붙이며 잘 가라고 했다.


다시 돌아간다면, 반드시 당신과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라도 남길 것이다.





몸이 아프면 당연히 병원을 찾듯이

마음이 아픈 것도 병원을 찾아야 한다.


아직까지도 우울과 공황은 나를 완전히 떠나지 않았지만

이 친구들과 조화롭게 사는 법을 배우면서 조금씩 이겨내야지.

그때까지는 기록하는 것을 멈추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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