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인간들 모두 까기 열일곱 번째.
나는 어려서부터 굉장한 문제아였다.
겉으로는 눈에 보이는 많은 사고를 쳤고
속으로는 대부분의 시간을 세상을 욕하는 데에 썼다.
10대 때 우리 가족은 나로 인한 가족 불화로 매일이 전쟁이었고,
성인이 되어 집을 나오면서 다행히 휴전이 되었다.
그 후 철이 들었어야 마땅할 텐데
난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는 자잘한 문제들을 매일 일으켰다면
이젠 조용히 있다 잊힐 때쯤 큰 사고로 부모를 힘들게 했다.
내 부모는 참으로 대단한 아이를 낳고 키우신 거다.
아직까지도 날 자식으로 아껴주고 사랑해 주시는
그래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 어머니를 말하고자 한다.
내가 반항을 하기 전 아주 어릴 때 우리 집 서열은
아빠 1등, 위에 형제 2등, 나 3등, 엄마 4등이었다.
가부장적인 아빠는 맞벌이에다 집안일로 바쁘신 엄마를 대신해
가정을 자신의 카리스마로 통치하려 하셨다.
자식들을 온전히 자기 손 위에 올려다 놓았고,
난 그의 뜻대로 움직이는 평범한 자식이었다. 그 기간이 길진 않았지만.
아빠의 통치 아래 난 꽤나 평범하게 살아가다 13살 때,
뜻하지 않은 반항으로 아빠가 만들어 놓은 우리를 뛰쳐나갔다.
어느 날, 시간이 늦은 줄 모르고 친구들과 놀다가 저녁 9시가 돼버렸다.
당시 통금시간은 없었지만 항상 눈치를 보며 아빠의 퇴근 시간 전에 집에 들어가곤 했어서
그 시간에 들어가면 엄청 혼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집에 안 들어가는 거였다.
지금 생각하면 코웃음이 나오지만, 그땐 진지했다.
그것이 내 인생의 첫 가출이었고,
다음날 친구들에게 붙잡혀 학교로 끌려갔을 때
밤새 운 엄마는 나를 꼭 안고는 더 펑펑 우셨다.
아빠는 가출한 나를 찾은 것에 안도하여 당연하지만 혼을 내지 않으셨다.
시간이 지나 내 불량함은 점점 더 극악해져서 친구들과 나쁜 짓들을 해댔고,
엄마의 카드를 훔쳐 친구들과 2차 가출을 진행했다.
며칠 만에 또 붙잡힌 나와 아빠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생겨버렸다.
나는 남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의견만 말하는 아빠를 무시하고, 싫어했다.
아빠는 자신의 자식이지만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고 그렇다고 팰 수도 없는 나를
온 힘을 다해 꾹 참아내며, 그 화를 엄마에게 돌렸다.
그렇게 우리 집은 나와 아빠의 끝없는 전쟁이 이어져갔고, 그 사이 늘 고통받는 건 엄마였다.
엄마는 웬만해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시크한 분이었지만
그때의 엄마는 숱한 눈물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우리 집 서열은 나 1등, 아빠 2등, 위에 형제 3등, 엄마 4등으로 바뀌었다.
13살 때 저지른 많은 사고로 지친 부모님은 결국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중학생이 된 나는 그전과는 다르게 다시 평범하게 살아갔다. (집 밖에서만)
그리고 그 해 생일 전날, 아빠가 외근하는 날이어서 난 엄마 옆에서 잠들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났는데 엄마가 날 쓰다듬고 계신 게 아닌가.
내가 눈을 뜨니 엄마는 "생일 축하해, 그리고 고마워"
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너무 놀랐다.
그렇게 철없는 행동들을 하면서 집안을 힘들게 한 나에게 어떻게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는지,
도대체 엄마는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나를 받아줄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의 그 한 마디는 나를 충분히 반성케 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이제 다시는 나 때문에 울게 할 일은 만들지 말아야지라는 다짐.
물론 엄마의 자식은 너무 대단했으므로 그 다짐은 지키지 못했다.
성인이 되고 혼자 살게 되면서 나는 의도적으로 부모님 집에 가지 않으려 노력했다.
명절이지 않은 이상 발을 들이지 않았고, 전화도 먼저 한 적이 없어
매번 엄마에게 살아는 있냐는 연락을 받았다.
여전히 거리를 좁힐 수 없는 아빠와 늘 고통받는 엄마를 보면 죄의식을 느껴
그 불편함을 느끼기 싫어 애써 무시한 것이었다.
워홀까지 다녀오면서 한동안 보지 못했던 가족을 오랜만에 보게 됐을 때
난 정말 깜짝 놀랐다.
내가 늙은 만큼 엄마도 늙어있는 것이었다.
외면적으로 늙은 것도 마음이 아팠지만 더 크게 마음에 와닿은 것은
엄마가 강해져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난 엄마에 대한 괜한 자부심이 있었다.
어렸을 때 난 엄마만큼 예쁜 사람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우리 엄마가 예뻐 보였고,
외모뿐만 아니라 가장 예뻐 보였던 건 고운 성품이었다.
엄마는 다른 아줌마들과 달리 억세지도 않고, 참하셨다.
늘 극성맞은 아빠와 나를 큰 소리 한 번 없이 한결같이 보듬어주시고 희생하는 분이셨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엄마는 어느새 아빠를 휘어잡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우리 집 서열은 나 1등, 엄마 2등, 형제 3등, 아빠 4등이 되었다.
아빠한테 늘 혼나고 아무 말도 못 했던 엄마는 이제 오히려 아빠를 혼내고
핀잔까지 주는 여유가 생겼다.
또 내가 경계하던 다른 아주머니처럼 억세졌고, 잔소리도 심해지셨다.
늘 연약하게만 보였던 내 엄마가 갑자기 슈퍼 엄마가 된 것이다.
그때 난 많이 속상했다.
더 이상 내 엄마가 다른 아주머니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속상하다는 게 아니라
엄마가 왜 강해질 수밖에 없었는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괜히 강해지지 않는다.
어떠한 시련 없이, 어떠한 고통 없이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근데 내 엄마는 변해 있었다.
내가 똑바로 보지 않으려고 한 그 시간 동안
엄마는 사회생활에서, 또 가족 내에서 받은 수많은 고통의 산물로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 대부분의 이유가 나인 것 같았다.
살아내느라 억세진 엄마를 보고 흘러간 세월을 처음으로 느꼈고
그만큼 엄마와의 시간이 없어진 것이 처음으로 실감이 났었다.
그래서 마음이 미어졌다.
그래도 한 편으론 웃음이 났다.
엄마가 드디어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말하고 있는 게 좋았다.
엄마가 취향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때도 그때였다.
아빠한테 당하지 않고 핀잔을 주는 엄마의 모습이 그렇게도 시원했다.
하지만 슈퍼 엄마가 된 엄마에게 나는 테스트를 하는 마냥 또 다른 고난을 주게 됐다.
나는 현재까지 우울증으로 내 삶을 지하 끝까지 끌고 내려간 적이 세 번이 있다.
27살 때, 두 번째로 우울감이 심하게 왔고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혼자서 고시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모아둔 돈도 없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두려워 아르바이트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친구들이 월세와 생활비를 보내줘서 겨우 생활하고 있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나는 그 당시 정말로 내 머리가 어떻게 된 줄 알았다.
끝없이 내려가는 무력감과 기쁨도 슬픔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이 날마다 이어졌다.
이 세상이 나를 철저하게 버림과 동시에 내가 내 발로 이 세상 밖으로 나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스스로 살 수 있는 방법을 모르겠어서 결국 정신병원을 생각했다.
하지만 생활비조차 친구들한테 받아서 쓰고 있는데 정신병원 갈 돈이 당연히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정말 그러면 안 되지만,
진짜 또다시 그럴 줄 몰랐지만.
엄마의 가슴에 또 한 번 크게 상처를 내었다.
처음이었다. 엄마한테 전화해서 카페에서 보자고 한 게.
그날 난 엄마한테 지금 내가 미쳐가고 있다고 말했다.
도저히 사회 안에서 사람들과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을 모르겠다고.
하나도 살고 싶지 않고, 그냥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근데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그니까 정신병원에 다니게 해달라고.
울면서 말하느라 제대로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내 말을 끝까지 말없이 듣더니
엄마답게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네가 병원 가고 싶으면 가라고.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뿐이냐고.
다 큰 자식이 오랜만에 전화해서 한다는 말이
정신병원 보내달라는 말이라니...
엄마는 과연 그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때보다 한참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난 그때의 이야기를 묻지 못했다.
그리고 난 점점 더 뻔뻔해져 갔다.
이전엔 엄마에게 느끼는 죄의식이 너무 강했으나
이제는 엄마가 내게 보이는 희생이 으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여전히 모르는 척, 끝없이 불효를 저지르고 있다.
엄마는 내가 미울 때마다 늘 장난스럽게 저주를 퍼부우신다.
꼭 나 같은 자식을 낳으라고.
덕분에 난 매번 비혼을 다짐하거나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을 생각이 추호도 없어졌다.
늘 생각하곤 했기 때문이다.
나 같은 자식이 있으면 난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냥 버렸을 거라고.
문득 그날이 떠오른다.
성인이 되어 가족 전쟁이 휴전이었던 당시에 엄마와 밤 산책을 하고 있었다.
나와 형제 둘 다 성인이 됐으니 이제 엄마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 나는 엄마한테 물어봤다.
엄마는 남은 꿈이 있냐고.
그때 엄마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네가 행복한 거."
내가 과연 엄마를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모성애는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 누구도 강요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 사랑을 당연시 생각하면 안 된다.
나한테 하는 말이다.
나는 언제나 부모에게 죄인이다.
죄질로 따지면 무기징역이겠지.
하지만 뻔뻔하게도 난 영원히 엄마란 사람을 이해하고 싶지 않다.
평생을 불효하며 칭얼대며 엄마의 못난 자식이고 싶다.
엄마를 이해하는 날, 난 내가 미치도록 싫어질 걸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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