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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노 Mar 03. 2020

가끔씩, 아주 가끔씩 거짓말처럼 이어질 때가 있다

좋은 일과 좋지 않은 일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우리의 마음에 따라

좋은 일들은 가끔씩 거짓말처럼 이어진다.
 나는 그 가끔씩 일어난다는 거짓말같은 좋은일의 연속을 경험했다. 대책없는 퇴사를 했고 대책없는 여행을 떠났었다. 혼자라면 모를까 아내와 다섯살 아들이 있었던 불혹에 가까운 아빠에게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퇴직금을 지원군 삼아 떠난 여행지에서 푸른 초원위의 박공 지붕을 얹은 집을 만났다. 그 집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 가족은 아파트가 아닌 마당이 있는 집을 갈구하게 되었고 여행에서 돌아와 마당이 있는 집을 찾아다녔다. 마음에 드는 땅을 찾았고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쓰고 아파트를 팔았다. 목조주택이 지어져가는 경이로운 과정을 지켜보면서 동시에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오는 것을 경험했다.

 지속가능한 일에 대한 고민으로 인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고 견디기 힘들 때 즈음, 어떤 이가 글로서 풀어보는 것은 어떠냐고 말을 건네주었다. 감정을 글로서 표현한다는 것은 쓰는 것 이상의 의미이자 치유였다. 이 글들은 같은 고민을 가진 누군가에 의해 읽혀졌고 공감을 얻었으며 SBS스페셜에서 연락이 와 방송촬영이라는 것도 해보게 되었다.  집이 완성되고 아내의 손재주가 엄청난 힘을 발휘하며 집안의 모든 것들은 아내의 손으로 채워져갔다. 이 과정 또한 글로서 정리를 하였고 TVN과 EBS에서 연락이 와 방송촬영을 하게 되었다. 신기한 일들은 계속 이어졌다. 아내가 직접 만든 가구로 집안 곳곳을 채워갔을 뿐 아니라 우리 가족의 하루하루도 거짓말같이 행복한 시간들로 채워져갔다.

 집을 지으며 발생한 대출을 갚기 위해 다시 일해야 했던 아빠에게 가장 큰 난관은 출퇴근이었다. 울퉁불퉁 국도를 가로질러 분당까지 가려면 편도 1시간30분이 소요되었다. 어떡하나, 고민하는 그 사이, 인터넷에 뜬 기사 한 줄을 보게되었다. 제2영동고속도록 개통. 기가 막혔다. 난 사실 이곳에 집을 지을때만 해도 이 근처에 제2영동 고속도로를 건설중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출근을 해야 했고 도로가 불편함을 느낄때 즈음 제2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된 것이었다. 국도이용 편도 1시간30분이었던 것이 50분으로 줄어들며 이 또한 거짓말처럼 행운으로서 내게 다가왔다. 양평에 오고나서 여기에 모두 다 쓰지 못할 만큼의 좋은 일들이 거짓말처럼 이어졌다. 그 가끔씩 이어진다는 그 일들이 말이다 



 2020년 새해 첫 주가 시작되었던 날, 나는 좋지 않은 일들도 거짓말처럼 이어진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첫 트리거가 당겨졌다. 내가 진행했던 프로젝트가 생산 중 꽤나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고, 이를 수습하는 3주동안의 시간들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넋이 빠지게 일했다. 처음으로 사고경위서, 시말서를 써봤으며 윗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견뎌야 했다.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르며 한 순간 폭발할 뻔한 적도 있었지만 아내와 결군의 얼굴이 떠올라 억눌렀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회사 동료가 입버릇처럼 되내이던 이 한마디가 고맙기도 했다. 3주가 지났을 무렵, 일은 해결점에 다다랐고 솔루션을 담당자에게 최종 전달할 수 있는 순간이 왔다.  긴장의 끈이 풀려서일까, 이 날, 나는 연초부터 왜 이런일이 나에게 찾아왔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등골이 서늘할정도의 이상한 기분이 들어, 엄마에게 전화를 드렸다.

"어, 잠깐만, 할머니가 교통사고 나셨대. 방금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고, 응급헬기 타고 병원으로 이동중이래. 나도 무슨상황인지 몰라. 좀 있다 다시 전화 할께"


 엄마는 이  몇 마디와 함께 전화를 뚝 끊었다. 싸늘했다. 안 좋은 기분이 들어 엄마한테 전화를 드렸는데 난데없이 교통사고라니...

내가 엄마에게 전화를 드리기 약15분전 할머니는 교통사고를 당하셨고, 엄마는 1분 전, 경찰에게서 전화를 받으셨다. 그 순간에 내가 엄마에게 전화를 드린 것이었다.


 아홉살 결군만큼이나 작아진 할머니의 작은 몸이 어지러운 관들과 선들로 감싸져 있었다. 눈을 뜨실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지만 할머니는 기적처럼 눈을 뜨셨고 삽관으로 말을 못하시니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연신 휘저으며 무언가를 말씀하셨다. 마지막을 예감하셨는지 자식들과 손주들을 잠시동안이나마 눈에 담으시고 다시 잠이 드셨다.

 할머니는 생사를 오가시다 그날 밤 돌아가셨다. 설 연휴 전날이었다.

우리 가족은 설 연휴에 할머니를 보내드렸다. 장례식장을 급히 마련했지만 사람들이 설에 장례식장 조문을 꺼려한다는 사실을 이 때 처음 알게 되었다. 제사를 지내는 분들은 조문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울 엄마는 할머니께서 이렇게 아프게 돌아가셨는데, 잘 가라 인사해주는 사람도 없다며 더욱 슬피 우셨다. 울 엄마 가는 날, 참 외로운 날 골랐다고 꺼이 꺼이 목놓아 우셨다.

장례식이 끝나고 정신을 차려보니 세상은 온통 중국 코로나로 난리였다. 울 할머니가 아프게 슬프게 돌아가셨는데, 이 슬픔마저도 이와 동시에 터진 코로나로 짓밟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좋은 일과 좋지 않은 일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좋은 일이 거짓말처럼 이어지는 듯 해도 그 사이에 좋지 않은 일은 있었고 슬픈 일이 거짓말처럼 이어져도 그 사이에 좋은 일은 있었을 것이다. 좋은 일이 많아지면 좋지 않은 일은 좋지 않은 일이 아닌게 되어버리고 좋지 않은 일이 많아지면 좋은 일은 좋은 일이 아닌게 되어버리나보다. 상황 속에서의 마음 상태가 모든 걸 잠식해버린다.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오래 전부터 들어오던 이 말을 새삼 곱씹어보게되는 연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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