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마음의 짐을 들어달라고 부탁해도 괜찮아
당신의 어깨엔 얼마큼의 걱정거리가 짊어져 있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많은 근심 걱정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힘들고 지쳐도, 무겁고 버티지 못할 것만 같아도 결국엔 짊어져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무게가 덜어지면 좋으련만 이놈의 것들은 숙성이라도 되는지 더욱 무거워질 뿐이다. 어떻게 해서 그 굴레를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잠시, 어느샌가 더 큰 굴레 속에 들어가 있음을 깨닫는다.
언제 어디서 쓰러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운 상태가 되어서야 버팀목을 찾기 시작한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아무 말하지 않고 힘든 것을 알아차린 어머니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상에 받는 위로. 마음속 응어리를 독한 술잔에 담아 털어 버릴 수 있도록 이야기를 묵묵하게 들어주는 친구. 전문적인 방법으로 심리치료를 받는 것까지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특히나 10대에서 20대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친구나 학교 선, 후배 사이에서 많이 위로를 받곤 한다. 어느 평일 저녁 갑작스러운 친구의 연락.
“오늘 시간 되면 술 한 잔 할까?”
피곤함에 찌들 만큼 찌들어 있던 나는 거절의 말이 목구멍까지 솟았지만 무겁게 가라앉은 친구의 목소리를 도저히 뒤로할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친구와 오랜 시간 동안 술자리를 함께했다. 친구는 연거푸 마음속 걱정거리들을 쏟아부었다. 나에게 고민들을 말한다고 지금의 상황이 당장에 바뀌거나 해결방안이 생기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고 실제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만, 녀석이 실컷 떠들어댈 수 있도록 묵묵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의 눈에 점점 생기가 돋아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고민거리를 조금이나마 덜어낸 친구의 표정은 전보다 더 밝았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들뜬 녀석이 이내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에게 물었다.
“근데 너는 한 번도 고민 상담을 안 한다?”
누군가의 짐을 덜어준 적은 있지만 내 안의 짐을 누군가에게 맡긴 적은 없었다. 아마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을 것이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고 손을 빌리는 것보다 혼자 속으로 삼키는 것이 익숙한 사람. 내가 바로 그랬다. 이렇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이 더욱 힘든 나를 보면서 조금의 억울함을 느끼는 것인지 걱정을 하는 것인지 친구가 한 숨을 내쉬곤 했다.
언제나 괜찮은 척. 긍정적인 사람이란 이미지를 갖고 있음에도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때 허망하기 그지없음을 느꼈다. 혼자서도 잘하니까. 타인의 시선이 그렇게 바뀔 때쯤, 정작 본인이 삶에 무게에 지쳤을 때 도와줄 사람을 찾을 수 없다. 분명히 어딘가 한 명은 날 위해 기꺼이 마음의 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테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은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다.
모든 생명체는 단일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꽃에도 암술과 수술이 있고, 동물에도 암컷과 수컷이 존재한다. 심지어 벌과 나비로 인해서 식물들이 살아가기도 한다. 사람이라고 다를까? 사람 또한 혼자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키워줄 부모님, 배움을 주는 선생님, 사랑을 나눌 배우자, 그 사랑의 결실인 자식들까지. 믿음을 주는 이 사람들을 스스로가 벽을 세워 거부한 채, 혼자되기를 희망하는 내 모습을 친구가 내뱉은 무심한 질문에서 발견했다.
“사람 너무 믿지 마라.”라는 말을 믿어왔다. 인생은 어차피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날 나는 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자신부터가 상대에게 믿음을 주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사람에게 믿음을 받을 수 있을까. 내가 나 자신을 가두었던 것이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그 손을 잡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날 나는 친구에게 미안함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내가 혼자 속앓이를 하는 것이 버릇되어 표현하지 못할 뿐이지 나도 매일을 걱정 속에서 허우적대며 간신히 살아가고 있다고. 친구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애써 거두고 조용히 미소 지으며 내 잔을 채워주었다.
아마 그날 저녁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