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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학 Jul 02. 2019

작은 촛불 같은 사람

내가 먼저 불씨 되기

부탕도화(赴湯蹈火)
어떠한 괴로움이나 위험한 일을 피하지 않는 태도를 이르는 사자성어.


용맹스러운 사람의 모습이 그려지는 이 사자성어가 왠지 모르게 나에게는 낯선 느낌을 안겨주고 있었다. 히어로 물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희생정신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만큼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조금의 고통이 따른다면 그것을 안고 견디는 것보다 피해 가는 것이 더욱 익숙해진 세상이다. 자신에게 피해가 가는 것이라면 일단 멀리하는 것이 순서가 된 지금, 그러한 모습은 남이 하면 비겁하다 하지만 내가 하면 현명함이 되어 버렸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무미건조하다 못해 바스러질 정도로 나약해진 세상이 되었다. 외적이 아닌 내적 심리 상태가 퇴폐해졌음을 느꼈다. 자유를 갈망하던 우리 사회가 개인주의가 되면서부터일까, 각자가 만들어 놓은 나와 남 사이의 벽들은 바벨탑처럼 나날이 높아만 갔다. 이제는 눈앞에서 직접 범죄현장을 발견해도 신고하기 꺼려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것을 ‘방관자 효과’라고 한다.


방관자 효과의 대표적 사례를 들자면 역시나 키티 제노비스 사건(Murder of Kitty Genovese)이다. 제노비스라는 한 여성이 새벽에 강도를 만나 피해를 보지만, 그것을 목격한 38명의 사람은 “누군가 신고하겠지.”라는 심리로 방관한 사건이다. 오래전 들었던 이 사건은 정말이지 말이 안 되는 사건이라고 느껴졌다. 어떻게 바로 앞에서 살인이 일어나는데 38명의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수가 있을까 의문했었다. 지금도 여전히 말이 안 되는 사건이라 생각이 들지만 한 편으로는 어쩌면 지금이라고 다른 결과가 나올까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술에 만취한 사람이 길바닥에 누워 자고 있으면 혀만 끌끌 찰뿐, 그대로 지나친다. 언성을 높이며 주먹다짐을 하는 사람들을 말릴 생각은 하지 않고, 은밀하게 휴대폰을 꺼내 동영상 촬영하며 SNS에 올리는 계획뿐이다. 이웃집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참견하지 않는다.


“오늘 좀 심하게 싸우는데 말려야 되는 거 아냐?”

“됐어, 남의 집 일에 신경 쓰는 거 아냐.”


양심이 분명하게 내려주는 명령을 애써 뒤로한 채, 행여 자신에게 피해가 갈까 쉬쉬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정의로울수록 멍청해지는 이곳에서 과연 어떠한 시선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용기 있는 자가 될 수 있을까. 잘못된 세상이 원인이 되겠지만 사실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습성에서 이기적인 내 마음의 비겁함을 알고 애써 핑계를 대는 것인지. 악(惡)은 악을 낳고, 어둠은 계속해서 커져감으로 한 치 앞도 모르는 두려움으로 데려가지만, 우리가 조금의 용기를 붙인다면 그 어둠은 너무나 허무할 정도로 쉽게 사라질 것이다. 다만 우린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 마음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을 뿐이다.


우리가 포기해버린 세상은 사실 작은 용기의 한 걸음으로 충분히 되살릴 수 있다. 작은 불씨로 주변을 환하게 비추는 것을 물론이고, 언젠가 그 불빛은 빠르게 옮겨 붙어 강렬하게 불타오를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작은 불빛 하나로도 충분히 밝아질 수 있듯이, 비록 당장에 모든 것을 뚫고 나아갈 용기가 없겠지만 적어도 세상에겐 부탕도화라는 피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을 작은 다짐의 빛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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