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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가장 Mar 30. 2020

모순. 그 쓰디쓴 이야기

'모순'을 읽고 '쓰다'를 쓰다.

쓰다...


[서평 39] 모순 _양귀자 (지음)


인생은 가까이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 채플린)


향긋한가요? 쓰디 쓴가요?


#1. 쓰다 : 맛이 쓰다. 싫거나 괴롭다.


  우리는 커피를 즐겨 마신다. 커피는 특유의 향이 매력적이다. 구수하다 못해 쓰디쓴 커피를 우리는 왜 마시는 걸까? 양귀자의 ‘모순’에 등장하는 ‘안진진’과 그의 가족들 모습은 꼭 독한 커피 같다. 진진의 삶은 대체로 그 맛이 쓰다. 하지만 그 쓴맛은 다양한 맛을 숨기고 있다. 신경 써서 음미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신맛, 떫은맛, 그리고 달콤한 맛까지. 만약 안진진이 이모의 딸인 주리였다면 그저 쓴 첫맛에 내팽겼을지도 모를 커피 같은 인생을 안진진은 묵묵히 들이키며 살아간다. 아니,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안진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이기에. 이제 너무 마셔서 그 쓴맛도 무덤덤해진 것처럼.


  커피는 마카롱처럼 강한 달콤함 속에도 정신을 번쩍 들게 해준다. 평범한 일상에서 가끔 겪어보는 인생의 고난은 우리의 삶을 소중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기회가 된다. 하지만 너무 잦은 ‘인생의 쓴맛’은 쓴맛 자체를 잊게 해준다. 심지어 쓰디쓴 인생을 버릴 수도 없다면? 그 쓴 맛에 적응하는 길 밖에 없다. 그러다보면 온통 시커멓게 나를 삼킬 것 같은 지옥처럼 쓰디쓴 커피 속에서 싱그러운 새콤함 같은 희망을 발견해야 한다. 때론,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를 달콤함을 부각시켜 느껴야만 한다. 이런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쓰디쓴 인생을 살아갈 힘이 되어주니까. 뱉어버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내일을 살아가는 힘이 되어 주니까 말이다.


  특히, 책 속 ‘안진진 엄마’는 이미 독한 커피의 중독자다. 힘든 삶에 중독되었다. 힘들수록 힘을 내는 이상한(?) 사람이다. 자꾸만 샷을 추가하다보니, 이제는 졸인 커피를 찾는 것 같다. 고농축 에소프레소를 한 모금 입에 넣고는 그 안에서 미세한 행복을 찾으려 애쓰는 모습은 애잔하기까지 하다. 더욱이 그 안에서 찾은 티끌 같은 행복을 삶의 전부라 여기며 또 다른 한 모금을 준비하는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누군가는 그렇게 쓴 인생이라면 퉤하고 뱉어버리면 그만이라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반드시 마셔야 한다면? 안진진은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아마 최종적으로 자신의 결혼 상대를 선택해야 할 때 이 점을 고려했을 것이다. 대체로 평범하고 달콤한 음식 가운데 가끔 쓴 커피를 마실 것인지, 늘 쓴 커피를 입에 달고 살 것인지를.


  그럼에도 안진진의 인생은 행복했을 것이다. 이미 세상 모든 달콤함도, 세상 모든 씁쓸함도 아주 가까이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인생은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는 그녀이기에 그래도 안심이 된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 - 모순(양귀자) -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상처는 상처로밖에 위로할 수 없다. - 모순(양귀자) -



#2. 쓰다 : 가면을 쓰다.


  우리는 가면을 쓴다. 또한 우리는 다른 이의 가면 일부를 본다. 직업, 부와 재산, 글과 책, 말과 표정이라는 가면을 본다. 사실 나도 나의 가면을 볼 뿐이다.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존재인지 모른 채 거울속의 나를 나라 믿는다. 타인이 평가한 나를 진짜 나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당연하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다. 타인과의 연결 없이 홀로 살수가 없는 세상이다.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친구며, 어딘가에 소속된 직원이고, 동료일 수밖에 없는 게 우리다. 우리는 그때마다 서로 다른 가면을 꺼내어 쓴다. 직장에서는 일 잘하는 직원의 가면을, 가정에서는 따뜻한 가족구성원의 가면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둘도 없이 헌신적인 모습의 가면을 말이다. 상황에 따라 너무 재빨리 바꿔 쓰기 때문에 우리는 가끔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기도 한다. 그저 원하는 모습에 불과한 가면의 모습을 진짜 나라고 착각하면서.


  ‘모순’ 속의 이모는 누가 봐도 행복한 모습이다.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교양 있다. 불행할 이유가 없는 그녀는 자신이 불행하다 여긴다. 안진진의 엄마는 정반대다. 세상 가장 불행한 삶을 살아가지만, 누구보다 활기차며 심지어 행복해보이기까지 하다. 이처럼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너무 쉽게 판단해버린다. 그저 밖으로 보이는 ‘가면’으로만, 그것도 아주 일부만 보았을 뿐인데, 마치 그 사람의 삶을 속속들이 아는 것인 냥, 심지어 그 사람의 내면 저 깊은 곳까지 꿰뚫어보는 냥 오만함을 보이기도 한다.


  남들보다 못한 삶을 산다고 불행하다 여길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그저 조금 나은 삶을 산다고 해서 스스로를 행복하다며 떠벌릴 것도 아니다. 또한 누군가가 삶이 어려워 불행하다가 판단할 것도 아니며, 그저 조금 여유로운 환경을 꼭 행복하다 단정 짓는 것은 위험하다. 남에게 보여주는 나, 내가 보는 남. 모두 각자의 삶이 있을 뿐이다.


(발췌) 나는 나인 것이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살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똑같이 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발버둥 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나를 학대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특별하고 한적한 오솔길을 찾는 대신 많은 인생선배들이 걸어간 길을 택하기로 했다. 삶의 비밀은 그 보편적인 길에 더 많이 묻혀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으므로.



#3. 쓰다 : 글로 쓰다.


  ‘모순’을 읽었다. 그리고 글로 쓴다. 소설을 잘 읽지 않는 나는, 항상 존댓말로 서평을 썼던 나는 이번에는 소설의 말투를 따라 반말로 글을 썼다. 왠지 그러고 싶었다. 책을 읽었지만, 좀 더 책과 연결되고 싶었다.


  ‘모순’은 장편소설이지만, 단편소설처럼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번 서평은 책 겉면에 작은 글씨 “쓰다.”를 통해 시작되었다. 함께 다정하게 있는 것 같지만, 등을 돌리고 있는, 그렇다고 멀찌감치 떨어지지는 않는 표지의 새들처럼 우리는 모순된 인생을 살아간다. 우리의 인생이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정신과 육체, 풍요와 빈곤이 수 없이 얽혀 있기에, 안진진이 극중 이모의 딸인 ‘주리’에게 던지는 대사는 더욱 날카롭게 다가온다.


세상은 네가 해석하는 것처럼 옳거나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냐. 옳으면서도 나쁘고, 나쁘면서도 옳은 것이 더 많은 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야. - 모순(양귀자) -



'모순'을 읽고, '쓰다'를 쓰다.






※ 이 글은 책의 내용을 옮겨 적고,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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