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3부 인생은 짧지만 잘살아낸 삶의 기억은 영원하다.
안목
101. 세상의 절반이 당신을 외면해도 그 가치를 인정해줄 사람이 있다.
세상의 절반이 당신을 외면한다 해도, 그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 어떤 이는 다수의 목소리에 묻혀 자기 목소리를 잃고, 또 어떤 이는 세상의 반쪽이 비웃는다고 해서 자신의 길마저 포기한다. 그러나 의견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고, 세상의 기준은 끊임없이 바뀐다. 오늘 옳았던 것이 내일은 틀릴 수 있고, 지금 비난받는 일이 언젠가는 칭송받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자기 생각대로만 재단하고 좌지우지하려는 태도야말로 가장 참기 힘든 어리석음이다.
완벽함이란 단 하나의 관점이나 시대의 기준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의견과 경험을 받아들이며 조금씩 확장되는 과정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며칠 후면 추석이다. 그 즈음 A라는 지인에게서 안부 전화가 왔다. 오랜만의 통화라 수술 사실을 모르는 그는 항암을 계속 받고 있느냐, 일주일에 몇 번 병원에 가느냐고 묻는다. 복직은 언제쯤 하느냐는 질문도 이어졌다. 단순한 관심이었지만 내겐 감사한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 집과 병원, 그리고 통증만 생각하다 보니 바보가 된 것 같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곧 나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듯 말도 했다. 그의 진심 어린 질문이 잠시나마 지친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B라는 지인은 이미 내 수술 소식을 들은 뒤였다. 그는 짧은 문자로 “힘들지만 조금만 더 견뎌보자”고 격려했다. 이어 명절을 잘 보내라며 돈까지 보내왔다. 나는 당황스러워 ‘큰돈을 왜 보내냐, 괜찮다’고 답장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더 많은 것을 해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마음은 고마웠지만,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문득 함께 운동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냈다. 다시 그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곧 함께 웃으며 운동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인사를 마쳤다. 그의 마음은 과했고, 내 마음은 부족했지만, 그 언어 속에는 분명 진심이 담겨 있었다.
C라는 지인은 내 상황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하던 사업을 정리했는데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며,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고 말했다. 투자금이 없어도 시작할 수 있는 일이 널려 있다며, 나와 함께 일을 하자고 권했다. 복직하면 스트레스만 더 받을 거라며 현재의 회사를 돌아가지 말라는 충고도 이어졌다. 삼십 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그는 통화를 끊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야 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내 안부를 물었다. 듣는 내내 피곤했지만, 동시에 사람의 말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흘러갈 수 있는지도 깨달았다.
D라는 지인은 달랐다. 그는 통화 내내 오늘 내 컨디션이 어떤지, 병원에는 다녀왔는지, 힘들면 언제든 이야기해 달라며 동행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의 질문은 짧았지만 진심이었고, 그의 배려는 말보다 깊었다. 몇 번이고 통화를 정리하려 했으나 그는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하고서야 “다음에 또 이야기하자”며 전화를 마쳤다. 삼십 분 동안 내 안부를 묻고 또 묻는 그의 태도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오늘은 새벽 여섯 시에 지하철을 타고 병원에 갔다. 이른 시간에는 셔틀버스가 운행하지 않아 천천히 걸어 병원에 도착했다. 방사선 치료를 마친 뒤 느릿느릿 집으로 돌아오니 식구들은 간식을 먹고 있었다. 그들은 방사선 치료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궁금해하며 각자의 상상으로 설명을 늘어놓았다. “큰 통에 들어가서 뜨거운 열을 쬐는 거 아니냐”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피곤했지만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려 자세히 설명했다. 내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다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가족들을 보니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문득 생각한다. 아픈 사람과 통화할 때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나는 지금껏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내가 시간이 있을 때 전화를 걸어 큰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해왔다. 상대방의 상황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채, 내 위주로 대화를 이끌었다. 그게 오만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아픈 사람의 마음은 늘 흔들리고 불안하다. 그럴 때는 한마디의 위로가 천 마디의 설명보다 힘이 된다. 조금의 사전지식이 있다면 상대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모든 이가 나의 안부를 물어주지는 않는다. 어떤 이는 모른 척하고, 어떤 이는 지나간 인연처럼 멀어진다. 그러나 오늘, 내 상태를 진심으로 묻고 내 마음을 살펴주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 하루는 귀하다. 힘들 때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은 그 자체로 큰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배운다. 무심코 던졌던 내 말과 행동을 돌아보고, 다시금 반성한다.
세상의 절반이 나를 외면한다 해도, 단 한 사람이 내 가치를 알아주고 내 안부를 물어준다면, 여전히 이 세상은 살 만하다. 사람의 마음은 크기를 잴 수 없다. 작은 관심이 큰 위로가 되고, 짧은 질문이 깊은 힘이 된다. 오늘도 그 한 사람,한 사람을 떠올리며, 참 귀한 하루를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