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3부 인생은 짧지만 잘살아낸 삶의 기억은 영원하다.
안목
102. 큰 행운을 맞기 전에 먼저 배짱을 키워라.
크게 베어 문 행운을 소화할 수 있는 위. 지혜를 몸이라고 한다면 그 안에서 가장 중요한 부위는 커다란 위이다. 위가 커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도 크기 때문이다. 큰 행운이 다가올 때 그것을 누릴만한 능력이 되는 사람은 당황하지 않는다. 같은 행운을 먹어도 어떤 사람은 과식으로 배탈이 나지만, 어떤 사람은 여전히 배가 고프다.
최근 사회복지학 수업에서 어느 날 교수님이 조별 과제를 내주셨다. 발표까지 하라는 말이 떨어지자 순간 교실이 술렁였다. 나이와 배경이 제각각인 학우들이 네 개 조로 나뉘었고, 내 조는 60대, 50대, 40대, 20대가 골고루 섞였다. 자료를 정리할 부분은 곧 정해졌지만 문제는 발표자였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서로 본인은 못한다며 손사래를 치면서도 상대방을 가리키며 “당신은 잘할 것 같다”고 말하는 기묘한 공방이 이어졌다. 결국 급하고 답답한 사람이 나서야 하는 상황, 그 선택은 내게 돌아왔다.
솔직히 처음에는 막막했다. 사회복지학 전공 지식이 아직은 낯설다. 책을 읽어도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고, 용어 하나에도 자꾸 막혔다. 하지만 피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시간이 있는 만큼 계속 읽고 정리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해될 것이라 믿었다. 준비하는 동안 점점 불안은 줄어들고 오히려 ‘해낼 수 있다’는 마음이 조금씩 싹텄다.
그때 문득 예전에 들었던 한 강의가 떠올랐다. 항암치료로 누워 있어야 했던 시절, 무력감에 빠져 있던 나를 붙들어 준 것이 온라인 강의였다. 몸은 아팠지만 누워서 귀로 듣는 공부는 가능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명강의 방법’ 강의였다. 민간자격증 과정이었지만 강의의 핵심은 분명했다. 발표를 잘하는 비결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꾸준한 연습과 마음가짐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었다. 지금 와서 그때의 노력이 다시 나를 살린다. 책상 앞에 앉아 그 강의를 다시 듣는 순간, 나는 발표라는 부담을 두려움이 아니라 훈련의 기회로 바라보게 되었다.
조별 과제는 단순한 수업 과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에게 ‘배짱을 기를 무대’였다. 발표를 맡지 않았다면 아마도 조용히 뒤에 숨어서 큰 행운을 소화할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하지만 발표자로 서게 되면서 나는 작은 교실 안에서나마 하나의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사람들 앞에 서는 순간은 늘 두렵다. 그러나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야만 배짱은 자란다. 큰 행운을 누리려면 작은 기회에도 온전히 뛰어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몸으로 배우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인생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무대의 연속이었다. 이혼이라는 큰 변화를 겪을 때도, 암이라는 병과 맞닥뜨렸을 때도, 나는 미처 준비되지 못한 상태로 무대에 올라섰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두려웠고,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깨달았다. 나에게 주어진 무대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반드시 오고, 그 무대에서 도망치지 않고 한 걸음 내딛을 때 비로소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것을. 행운이든 시련이든 결국은 같은 뿌리에서 자란다는 것을.
이번 발표도 마찬가지다. 나는 여전히 부족하다. 학문적 지식도, 말하기 기술도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완벽함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을 피하지 않는 용기다. 준비하며 느끼는 설렘, 긴장 속에서 배우는 집중력, 그리고 사람들 앞에 서서 목소리를 내는 순간 생겨나는 힘. 그것이 나를 조금 더 성장시킨다.
큰 행운을 기다리며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은 정작 그 행운이 왔을 때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작은 기회를 붙잡아 위장을 단련한 사람은 어떤 크기의 행운이 와도 당황하지 않는다. 이번 발표는 어쩌면 작은 사건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 작은 무대에서 배짱을 키워야 더 큰 무대를 만났을 때 당당히 설 수 있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번 기회를 피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발표는 단순한 과제가 아니라 나 자신을 키우는 과정이다. 나를 두렵게 하는 바로 그것이 내 배짱을 단단하게 만든다. 언젠가 더 큰 행운이 다가오더라도, 나는 그것을 소화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결국 배짱은 행운을 담는 그릇이고, 위는 행운을 소화하는 힘이다. 이번 조별 과제가 내게 준 선물은 지식 이상의 것이다. 바로, 큰 행운을 맞이할 수 있는 나만의 ‘위’를 키울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