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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통과하며

by 또 다른세상

시간은 참 빠르다.
10월 한 달 내내 매일같이 병원으로 향하며, ‘언제쯤 끝날까’ 세어보았다.
이제 단 하루만 남았다. 그렇게 기다리던 끝이 눈앞에 있다.


예약 시간에 맞춰 병원 복도를 서둘러 걷는다. 새벽의 찬 공기와 병원 안의 따뜻한 공기가 뒤섞이며 몸이 금세 데워진다. 두꺼운 옷 속으로 땀이 흘러 얼굴이 따끔거린다. 잠시 멈춰 땀을 식히고 접수증을 받아야겠다 생각하던 순간,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사람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오늘 마지막 방사선 끝났어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축하드려요. 고생 많으셨어요.”


그녀는 방사선실 선생님들과 간호사들에게 음료수를 드리러 간다고 했다.
그 따뜻한 마음이 참 고마웠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따뜻해졌다.


외투를 벗으니 얼굴의 따가움이 조금 가셨다. 대신 겨드랑이 쪽 땀이 신경 쓰였다.

방사선과 대기실에 도착해 잠시 앉았다.
치료실 안에서는 “고생 많았습니다.”라는 익숙한 인사가 들렸다.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왼팔이 잘 올라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조용히 만세 자세를 해보았다. 여전히 뻣뻣했지만, 천천히 심호흡하며 오른손으로 왼손을 당기자 조금 나아졌다.


그때 담당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막 일어서려는데 조금 전의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잠깐만요, 죄송해요.”
손에는 커피와 간식이 잔뜩 들려 있었다.
“그동안 치료 잘 해주셔서 감사해요.”
선생님들이 웃으며 받았고, 그녀는 내게 미안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따뜻한 마음이 복도 가득 퍼졌다.

암 환자들이 받는 방사선치료가 어떤 것인지 이제는 안다.
처음엔 그저 치료의 일부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얼마나 고된 과정인지 몸으로 알게 되었다.


3주차가 지나면 상처 부위와 겨드랑이, 목이 까맣게 변한다고 교수님은 말했다.
피부가 벗겨질 수도 있으니 수분을 자주 보충하라고 했다.
그 말처럼 내 피부는 타들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상처마저 내 몸의 회복을 증명하는 표식처럼 느껴진다.


오늘은 15회차. 침대에 눕고 상의를 벗는다. 차가운 공기가 닿는다.
기계가 머리 위로 돌아가며 ‘윙―’ 하는 소리를 낸다.
처음엔 그 소리가 무서웠다. 거대한 기계가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이제는 그 소리 속에서 눈을 감고 기도한다.
오늘 이 자리에 있게 해준 것에 감사하고,
의료진의 정성과 가족, 친구, 나를 걱정해주는 모든 이들에게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넨다.


기도가 끝날 즈음이면 치료도 끝이 난다.
몸은 조금 무겁지만 마음은 한결 가볍다.
오늘도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치료실을 나서며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다짐한다.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하자.
좋은 생각을 품고, 감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담당자가 말했다.
“이제 다음 주면 치료가 끝나네요.”
그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방사선이 끝난다는 건 곧 항암이 기다린다는 뜻이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다. 그저 받아들이기로 했다.


두려움이 스멀스멀 마음으로 들어올 때면 이렇게 되뇌인다.
“하루만 생각하자. 지금 이 순간만.”

먼 미래를 미리 걱정해서 기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두렵다면 그건 불필요한 걱정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이 있으면 또 다른 시작이 있다.
그 사이에서 나는 매일 선택하며, 나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이 지금의 나를 완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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