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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선생 Oct 12. 2019

내가 19세기 남자와 사는 법

5년 동안 5억 벌기 두 번째 이야기

너네 할머니가 아빠를 쉰에 낳았어. 아빠가 쉰둥이야.


 불콰해진 얼굴로 그가 말을 꺼낸다. 취했다는 신호다. 큰 아버지가 자신에게 딱 한 번 손댄 적이 있다는 말이 붙는다. 큰 아버지는 동생 공부시키겠다고 목숨 걸고 베트남전에 갔다 왔단다. 그런데도 공부를 안 하는 그에게 너무 화가 나서 때렸다는 이야기다. 별로 대단한 서사가 아닌 것 같은데, 그는 이 이야기를 좋아한다. 술을 마실 때마다 매번 하는 이야기라 듣는 나는 별 감흥이 없다. 그저 ‘기분이 좋은가 보다.’라든가, ‘자기는 딱 한 번 맞았다면서 왜 우리는 그렇게 많이 때렸을까?’ 정도의 생각만 할 뿐이다. 물론 겉으로는 재밌다는 듯 대꾸하며 빈 술잔에 술을 채운다.


 속상한 마음에 쉬지 않고 적어 내려간 글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 사람들은 불행에 관심이 많다. 이제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까?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쓰는 게 낯간지러웠다. 고통스럽다고 말해놓고선 다음 글에 수줍었던 첫사랑을 풀어내는 건 이상하다. <1억이 있으면 교사가 될 수 있나요?> 같은 자극적인 글도 생각해봤다. 나라도 ‘그’보다는 ‘돈’, ‘은밀한 뒷거래’에 관심이 있을 것 같다. 잠시 머뭇거리다 접었다. 그리고 제목을 적었다. 그의 이야기다. 그의 사고로 시작한 브런치니까. <‘그’ 관찰기>가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그를 잘 모른다.


1956년 1월.


 그는 쉰둥이로 태어났다. 그의 말이 정확하다면 할머니는 1907년생, 할아버지는 그보다 몇 살 더 위였을 게다. 조선인의 자식으로 태어난 한국인인 그를 나는 19세기 사람이라 부른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다. 그는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가출하여 서울에 자리를 잡고, 기술을 배웠다. 같은 하꼬방지기인 내 외삼촌의 소개로 엄마를 만나 결혼을 했고 형과 나를 낳았다.

 그는 나쁜 사람이었다. 노름을 좋아했다. 엄마를 종종 때렸으며, 3년에 한 번쯤은 가출을 해서 3개월쯤 후에 욕지거리와 함께 집에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초등학교 때도, 중학생 때도, 내가 고3일 때도 그는 내게 꽤 힘겨운 기억을 남겨주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 하나.


새벽이었다. 아파트 문이 부서져라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그다. 느그들끼리 똘똘 뭉쳐 잘살라며 집을 엉망으로 만들고 나간 지 꼭 달째. 오랜만에 쌓아올린 평화가 다시 무너졌다. 수염이 더부룩한 채로, 빨간 등산 가방에 소주병을 가득 채워온 그가 식탁에 앉았다. 소주병을 거실에 둘러놓고 줄담배를 물었다. 욕지거리를 섞어 그가 말을 뱉었다.


“내가 왜 내 집을 나가! 나가려면 느그 새끼들이 나가야지! 이 호로새끼들.”
“아주 인간 같지도 않지? 내가 다시는 나 같은 새끼 기억도 안 나도록 철저하게 정 떨어지게 해 줄게.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나 봐 봐.”


 비참했다. 또 우스웠다. ‘나가 살아보니 외롭고 힘들었나 보다.’ ‘꼴에 자존심 세운다고 이야기하는 꼬락서니 좀 봐.’

그 뒤는 똑같았다. 며칠을 울고, 몇 달간 어색함이 흐른 뒤 또 여느 때처럼 가족이란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나는 그를 좋아한다. 무슨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다. 니가 몰라서 그런다고. 가정폭력은 절대 멈추지 않으며, 그가 한 행동은 가족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테러행위라고 내게 알려줄 수도 있다. 그는 사회에서 육체노동자로서 받는 스트레스를 가정에서 약자들에게 폭발시킨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를 읽은 사람이라면 유년기 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그가 왜곡된 성격을 갖게 되어 일어난 일이라 설명할지도 모르겠다.


 안다. 다 안다. 직접 경험해본 내가 더 잘 안다. 일종의 애증이다. 미운 그였지만, 좋았던 그의 모습도 파편처럼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는 성실한 사람이다. 일터에 절대 늦는 일이 없고, 일처리를 대충 하는 법이 없었다. 외할머니에게 꽤 큰돈을 용돈 쓰시라 쥐어주고는 흐뭇해하기도 했고, 가출해있는 와중에도 내게 찾아와 멋진 가방을 사주기도 했다. 대학 등록금을 대준 것도 그고, 더 어릴 적 바나나 두 개를 사 와 형과 나에게 건네주던 것도 그다.


 그는 내게는 혹독하지 않았다. 내가 공부를 곧 잘해서 그의 자랑거리였던 점이 컸을 것이다. 엄마와 형과 달리 그에게 순종적이었던 것도 이유가 됐을 것이다. 그가 벅찼던 엄마는 내게 엄마의 역할까지 많이 부탁했다. 어르고 달래고, 그가 화난 이유를 그에게 하나씩 설명해주고. 나로서는 나까지 어긋나면 엄마가 너무 힘들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에게도 긍정적이었으면 어찌 됐든 좋은 일이다.


 가족 간의 따뜻한 화해를 주제로 글을 쓰지는 못 하겠다. 그저 이 사람을 돌아보고 싶었다. 또 우리 가족을. 19세기 남자가 20세기 여자와 결혼해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이야기. 이번 큰 사고는 힘들지만 또 힘들지 않다. 이건 사고일 뿐인데 뭘. 더한 일도 겪고 지내온 엄마, 형, 나인데 뭘. 그 전엔 그와 맞서서 이겨내야 했지만, 이번엔 그와 함께, 서로 의지하며 이겨내면 되는 일이다. 전보다 훨씬 쉬운 일이다.  



<현재 잔액>

200만 원 (엄마가 준 이사 축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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