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적(敵)이었고 그것은 곧 희망이었다.
무슨 말이냐면..
나의 환경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 문제의 환경이 내 힘으로는 도저히 바꿀 수 없다면
나를 바꾸자. 나를 환경에 맞추자 그러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는 희망으로 살았다.
나만 바뀌면 돼.
나만 해결되면 모든 건 다 잘 될 거야.
그렇게 나에게 나는 해결해야 하는 대상, 문제 그리고 적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는 '적'
야식을 먹는 '적'
살이 찐 '적'...
나는 나를 대상화하고 평가했다.
그 반대편에는 주체성을 잡고 싶어 했다.
그럴 때면 이 두 가지 마음이 충돌해 더 어지러워졌다.
더 쉽게 말하자면 아래의 상황과 같다.
살이 찌고 보통 주변에서 듣는 얘기는
'너는 살만 빼면 예쁠 텐데'
'언니는 예쁜데 동생은 왜 그래?'
등 온갖 비교와 폄하의 말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 말을 한 사람을 고칠 수도 그렇다고 이미 입은 상처를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면 나는 또 다른 해결 방법을 찾는다.
'내가 살을 빼서 예뻐지면 저런 얘기를 듣지 않을 거야.'
그렇게 되면 '나는 더 이상 상처받지 않을 거야'라는 희망을 만들게 된다.
그렇게 나는 미래에 살이 빠지면 상처받지 않을 거라는 희망과 함께
현재의 내 몸은 나를 욕먹이는 대상으로 만든다.
그 와중에 야식은 아니
야식을 시키는 그 순간만큼은 내가 내 손으로 결정을 내리는 유일한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먹는 것보다 주문하는 행위가 더 중요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하는 선택의 순간.
하루 중 유일하게 나라는 사람이 나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이다.
스스로에게 몸은 욕을 먹이는 대상이지만
야식이라는 주체성 부여 시간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나 자신에게 자유는 줘야겠고 하지만 그 결과로 살이 찌면 또 그것대로 스트레스를 받았으니 말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마음이 변한 데는 오랜 시간 내 감정이 공감받지 못하거나 방치되거나 등의 이유가 있다.
예를 들면 어렸을 때의 일이다.
고등학생 때 우울증에 대한 지식을 없었으나 하루 종일 잠만 자거나 의지가 있는데도 행동을 수행하지 못함이 나 스스로 의문스러웠다. 그래서 엄마에게 상담을 받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때의 우리 엄마의 대답
'그건 네가 게을러서야'
나의 무기력은 게으름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이런 일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또 가장 크게는 나를 앞에 두고 내 형제를 욕했던 나의 부모.
나라는 존재의 감정은 배려 따위 하지 않은 채 듣든 말든 내 형제 험담을 하셨다.
이렇게 자라온 나는 부모는 바꿀 수 없고 그렇다고 집을 나갈 수 없으니
내가 바뀌자 그러면 괜찮아질 거야 라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마음도 당연히 한계가 와서 20대 초반에 집을 뛰쳐나왔지만 말이다.
현재 나의 글만큼 내 머릿속도 어지럽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방향만큼은 맞다고 믿는다.
더 이상 내 몸을 적으로 대하지 않고
나를 바꿔서 희망을 얻지 않는 방향 말이다.
그 앞엔 한숨이 아닌 편안히 숨을 고르는 내가 있지 않을까.